결혼 15년차, 아내가 전업주부인 세상은 여전한가
- 14 Dec, 2025
월급날의 무게
월급날이다. 통장에 650만원이 찍혔다. 세전 9500만원의 12분의 1.
웃긴 건 이 돈이 내 돈이 아니라는 거다.
관리비 62만원, 대출 이자 180만원, 생활비 250만원, 학원비 120만원. 계산기 두드리면 남는 건 고작이다. 아내한테 카톡 보냈다. “들어왔어.” 답장은 없다. 읽음 표시만.
15년 전엔 이렇지 않았다. 맞벌이였으니까. 아내도 개발자였다. 우리 연봉 합치면 1억 2천이었다. 둘 다 야근하고, 주말엔 같이 카페 가서 코딩했다.
아들 낳고 1년 후 아내가 말했다. “나 그만둘까 봐.”
나는 대답 못 했다. 육아휴직 끝나고 복직했는데 아이가 아프면 늘 아내가 조퇴했다. 회의 중에 어린이집에서 전화 오면 아내 얼굴이 굳었다. 6개월 버티다가 퇴사했다.
그때부터다. 내가 가족의 ‘전부’가 된 게.

커리어 선택이 내 것이 아닐 때
작년에 스타트업에서 연락 왔다. CTO 제안이었다. 연봉은 비슷한데 스톡옵션 있다고. 기술도 재미있어 보였다. Rust, Kubernetes, 요즘 핫한 거 다 쓴다고.
저녁에 아내한테 얘기했다. “스타트업에서 제안이 왔어.”
아내 표정이 굳었다. “망하면?”
나는 말 못 했다. 스타트업 5년 생존율이 30%라는 거. 우리 둘 다 안다.
“애들 학원비만 해도 120이야. 대출 이자는 180이고.”
맞는 말이다. 틀린 말도 아니다.
거절했다. 메일 쓰는 데 2시간 걸렸다. “가족 사정상” 이라고 썼다. 진짜 이유는 안 썼다. ‘내가 무너지면 집이 무너져서’라고.
40대 후배가 그 회사로 갔다. 지금 잘 되고 있다. 페이스북에 신기술 자랑한다. 부럽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대기업 IT 자회사에서 20년째다. 안정적이다. 망하진 않는다. 그런데 재미는 없다. 레거시 코드 유지보수하고, 회의하고, 보고서 쓴다.
이게 내가 원한 개발자 인생인가. 모르겠다.

8명의 무게
파트장 달았다. 팀원 8명. 이게 영광인지 족쇄인지.
매주 월요일 1on1 한다. 8번. 한 명당 30분. 4시간. 오전이 사라진다.
28살 신입이 물었다. “파트장님, 저 이직 고민인데요.”
속으로 생각했다. ‘가라. 젊을 때 가.’ 입으로는 다르게 말했다. “왜? 여기 안 좋아?”
“아뇨. 그냥 새로운 거 해보고 싶어서요.”
부럽다. 이직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거면. 나는 ‘할 수 없어서’ 못 하는데.
32살 기혼 팀원도 고민 상담했다. “파트장님은 어떻게 하세요? 커리어랑 가정.”
나는 웃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어.”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다. ‘선택 못 해. 가정 때문에.’ 그런데 그 말이 안 나왔다.
팀원들 연봉 협상도 내가 한다. 올해 인상률 3%. 8명 중 6명이 불만이다. 당연하다. 나도 불만이니까.
상사한테 얘기했다. “팀원들 사기가 떨어져요.”
“알아. 그래도 예산이 이래.”
결국 내가 중간에서 샌드백이다. 위에서는 “팀 관리 잘해”, 아래에서는 “연봉 너무 적어요”.
코딩이라도 하면 스트레스 풀리는데 그럴 시간도 없다.

퇴근길의 계산
퇴근한다. 8시 30분. 야근 아니라고 한다. 우리 팀 기준으로.
지하철 탄다. 앉았다. 핸드폰 본다.
요즘 AI 개발자가 핫하다는 기사. 연봉 2억. 나는 9500. 반도 안 된다.
그런데 AI 공부하려면 퇴근 후에 해야 한다. 밤 10시부터 새벽 2시까지. 가능은 하다. 20대 때는 했으니까.
지금은 못 한다. 체력이 안 된다. 새벽에 공부하면 다음 날 회의에서 졸고, 그러면 팀원들한테 ‘파트장님 요즘 피곤하세요?’ 소리 듣는다.
그럼 주말에? 토요일은 아들 학원 픽업. 일요일은 가족 외식. 이게 15년간 패턴이다.
아내한테 말했다. 한 달 전에. “나 주말에 공부 좀 해야 할 것 같아.”
“뭐 공부?”
“AI. 요즘 트렌드거든.”
아내가 웃었다. 비웃는 건 아니었다. 그냥 피곤해 보이는 웃음.
“당신 주말에도 노트북 보잖아. 그것도 모자라?”
할 말이 없었다. 맞으니까.
집에 도착했다. 9시 40분. 아이들은 자고 있다. 아내가 밥 데워뒀다. 혼자 먹는다.
TV 켠다. 뉴스 나온다. “2024년 평균 퇴직 연령 53세.” 나는 45세. 8년 남았다.
8년 후에 뭐 하지. 은퇴하면 수입 제로다. 아내는 15년간 경력 단절. 애들은 고등학생, 중학생. 돈 제일 들어갈 때.
계산기 두드렸다. 대학 등록금, 생활비, 노후 자금. 최소 5억은 있어야 한다.
지금 모은 돈? 1억 2천. 부족하다. 많이.
대학 동기 모임
분기별로 만난다. 대학 동기 5명. 다들 컴공 출신.
한 명은 임원. 연봉 1억 8천. 두 명은 창업. 한 명은 대박, 한 명은 망해서 재창업 중. 나머지 한 명은 프리랜서. 연 매출 2억.
나는? 대기업 자회사 파트장. 9500.
술 마시면서 물었다. 임원 된 친구한테. “형은 개발 아예 안 해?”
“못 하지. 미팅이 하루에 8개야.”
“후회 안 해?”
“후회? 돈은 두 배인데.” 웃으면서 말했다. 근데 눈은 안 웃었다.
창업 친구한테 물었다. “너는 좋겠다. 하고 싶은 거 하잖아.”
“좋긴. 3개월째 월급 못 받았어. 투자 받으려고 IR 30번 넘게 했고.”
“그래도 네 선택이잖아.”
“선택? 빚이 5억이야. 선택의 여지가 없어.”
다들 힘들다. 다만 힘든 방향이 다를 뿐.
집 가는 택시 안에서 생각했다. 나는 뭐가 힘들지.
가족 때문에 선택지가 없는 게 힘들다. 도전하고 싶은데 못 하는 게. 망해도 되는 판에 혼자 있었으면. 아니다. 그런 생각 하면 안 된다.
아내한테 카톡 보냈다. “조금 있다 도착해.”
읽음. 답장 없음. 자는 것 같다.
아내의 시간
주말 아침이다. 10시. 늦잠 잤다.
거실 나왔다. 아내가 설거지한다. 아이들은 학원 갔다.
“어제 늦었네.” 아내가 말했다.
“응. 동기 모임.”
“요즘 피곤해 보여.”
“괜찮아.”
괜찮지 않다. 둘 다 안다.
커피 내렸다. 둘이 마신다.
아내가 물었다. “회사 일 재미있어?”
“글쎄.”
“이직 생각은?”
“있지. 근데…”
말을 못 했다. ‘당신 때문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왔다. 삼켰다.
아내가 말했다. “내가 미안해.”
“뭐가?”
“일 그만둔 거.”
나는 고개 저었다. “아니야. 선택한 거잖아. 우리 둘 다.”
그런데 진심인지 모르겠다.
15년 전에 아내가 퇴사할 때 나는 찬성했다. “그래, 아이가 중요하지.” 그게 진심이었나. 아니면 ‘어차피 내 연봉이 더 높으니까’ 였나.
아내가 계속 일했으면 지금 어땠을까. 맞벌이 연봉 1억 5천. 리스크 분산. 나도 자유롭게 이직하고, 도전하고.
그런데 그러면 아이들은? 둘 다 야근하면 누가 돌봐. 학원 픽업은? 아플 때는?
결국 누군가는 포기해야 했다. 아내가 했다. 그게 전부다.
“당신 때문 아니야.” 내가 말했다.
“알아.” 아내가 웃었다. “그냥 가끔 생각해. 나도 계속 개발했으면 어땠을까.”
나도 가끔 생각한다. 아내가 계속 개발했으면 나는 어땠을까.
다음 15년
회사에서 임원 승진 대상자 명단 돌았다. 내 이름 있다.
승진하면 연봉 1억 2천. 그런데 개발은 못 한다. 완전히 관리직. 전략 기획, 예산 편성, 임원 회의.
팀원들은 축하한다. “파트장님 임원 되시겠네요!”
웃으면서 답했다. “아직 몰라.”
사실 확정이다. 나이, 연차, 성과. 다 맞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하고 싶지 않다.
임원 된 선배한테 물었다. “형, 임원 생활 어때요?”
“돈은 좋지. 근데 코드는 진짜 못 봐. 볼 시간도 없고, 보면 이해도 안 돼.”
“후회는?”
“후회? 그런 거 할 여유 없어. 애 둘 대학생이거든.”
다 똑같다. 돈 때문에 못 그만둔다.
나도 마찬가지다. 임원 안 하면? 파트장으로 5년 더. 그러다 권고사직. 50살에 짤리면 갈 데가 없다.
임원 하면? 연봉 1억 2천. 은퇴까지 10년. 그동안 3억 모은다. 부족하지만 버틸 수는 있다.
선택지가 없다. 가족이 있으니까.
저녁에 아내한테 말했다. “나 임원 승진 대상자래.”
“진짜? 축하해!”
“응…”
“왜? 안 좋아?”
“아니. 좋지. 당연히.”
거짓말이다. 좋지 않다. 그런데 거절할 수도 없다.
아내가 물었다. “연봉 얼마야?”
“1억 2천.”
“와. 좋네.”
좋다. 객관적으로. 주관적으로는 모르겠다.
15년차의 답
결혼 15년. 아내 전업주부.
이게 잘못된 선택이었나. 모르겠다.
아이들은 잘 자랐다. 아들은 수학 전국 30등. 딸은 피아노 콩쿨 금상. 아내가 케어했다. 나는 못 했다. 시간이 없었으니까.
집은 안정적이다. 대출 있어도 갚는 중. 밥은 매일 따뜻하게 있고. 빨래는 항상 돼 있고.
나는? 개발자로서는 정체됐다. 관리자로서는 성장했다. 가장으로서는 책임 다했다.
행복한가. 모르겠다. 불행한가. 그것도 모르겠다.
그냥 살고 있다. 가족 먹여 살리면서. 이게 45살 기혼 개발자의 현실이다.
20대 때는 상상 못 했다. ‘커리어’가 ‘내 것’이 아니게 될 줄. 모든 선택에 가족이 변수로 들어올 줄.
후회하냐고? 모르겠다. 다시 돌아간다면? 똑같이 할 것 같다.
왜냐면 나는 겁쟁이니까. 리스크 못 지는.
혼자였으면 달랐을까. 스타트업도 가고, 창업도 하고, 망해도 다시 일어서고.
그런데 나는 혼자가 아니다. 15년 전에 선택했다. 가족을.
그래서 오늘도 출근한다. 회의하고, 코드 리뷰하고, 보고서 쓴다. 임원 승진 준비한다. 연봉 1억 2천 받으려고.
이게 책임이다. 한 가정의 기둥으로서.
무겁다. 가끔 버거울 때도 있다. 그래도 내려놓을 수는 없다.
왜냐면 나 말고는 없으니까. 이 집을 떠받치는 사람이.
월급날이 돌아온다. 다음 달에도. 그다음 달에도.
통장에 돈이 찍힌다. 그리고 사라진다. 관리비, 대출, 생활비, 학원비.
남는 건 없다. 그래도 괜찮다.
이게 내가 선택한 삶이니까.
결혼 15년차, 아내 전업주부, 연봉 9500. 이게 2024년 한국 40대 개발자의 평범한 무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