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가 말한 '편하게 하시죠' - 그게 왜 더 불편해?

후배가 말한 '편하게 하시죠' - 그게 왜 더 불편해?

목요일 오후 3시

“박 파트장님, 이번 아키텍처 리뷰는 편하게 하시죠. 저희가 다 처리할게요.”

28살 후배 준영이가 웃으며 말했다. 친절한 얼굴이다. 진심으로 배려하는 표정이다.

“아, 그래. 고맙네.”

나는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모니터를 켰다. IntelliJ가 떴다. 커서가 깜빡인다.

근데 손이 안 움직인다.

‘편하게 하시죠.’ 그 말이 계속 맴돈다.

존경인가, 거리두기인가

준영이는 나쁜 애가 아니다. 오히려 팀에서 제일 예의 바른 애다.

내가 코드리뷰 할 때 메모 꼼꼼히 읽는다. 1on1 때 질문도 잘한다. 회식 때 술도 따른다.

근데 왜일까. 그 ‘편하게 하시죠’가 자꾸 걸린다.

작년만 해도 달랐다. 준영이가 신입이었을 때.

“파트장님, 이 부분 어떻게 짜는 게 좋을까요?”

“파트장님, 이 에러 좀 봐주시겠어요?”

“파트장님 코드 보니까 이런 패턴이 있던데요.”

나는 옆에 앉아서 같이 코드를 봤다. 같이 디버깅했다. 같이 밤을 샜다.

그땐 나도 ‘개발자’였다.

지금은 뭐지. ‘관리자’인가. ‘의사결정권자’인가.

아니면 그냥 ‘나이 든 사람’인가.

편하게 하라는 건

점심시간이다. 사내식당에서 후배들과 먹는다.

“요즘 Rust 괜찮던데요. 성능이 확실히 다르더라고요.”

“맞아요. 근데 진입장벽이 좀…”

“그래도 배워둘 만한 것 같아요.”

후배들이 신나게 떠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요즘 Rust가 뜨긴 하더라.”

사실 나는 Rust를 안 써봤다. 튜토리얼 한두 개 본 게 전부다.

예전엔 몰랐다. 물어봤다. “어떻게 쓰는 건데?” 하고.

지금은 안 물어본다. 괜히 ‘그것도 모르세요?’ 소리 듣기 싫어서.

아니, 사실은 그것도 아니다. 후배들은 그런 말 안 한다.

그냥 ‘편하게 하세요’ 하고 알아서 처리한다.

그게 더 불편하다.

내가 싫어진 건 아니다

오해는 하지 말자. 준영이나 다른 후배들이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잘해준다. 회의 때 내 의견 물어본다. 결정 미루면 기다려준다.

“파트장님 판단이 맞을 것 같아요.”

“파트장님 경험이 많으시니까요.”

그 말들이 진심인 것도 안다.

근데 왜 자꾸 이 느낌이 드는 걸까.

‘아, 이 사람은 이제 코드 안 짜는 사람이구나.’

‘관리만 하는 사람이구나.’

‘우리랑은 다른 레이어에 있는 사람이구나.’

저녁 8시다. 후배들이 하나둘 퇴근한다.

“파트장님, 먼저 들어갑니다.”

“내일 봬요!”

나는 손 흔들며 보낸다. “그래, 조심히 가.”

사무실이 조용해진다. 이제 내 시간이다.

IntelliJ를 켰다. 프로젝트를 열었다. 코드를 봤다.

근데 웃긴 게 뭔지 아나. 이제 혼자 코딩하는 게 더 편하다.

후배들 있을 때는 뭔가 눈치가 보인다. ‘파트장님이 저걸 왜 직접 하세요?’ 하는 시선.

실제로 말은 안 하지만 느껴진다. 공기가 다르다.

20년 전 내가 그랬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다. 20년 전.

당시 우리 팀장님. 40대 중반이었나. 개발 경력 15년.

어느 날 밤늦게 팀장님이 코드를 고치고 계셨다.

나는 옆에서 봤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팀장님이 저걸 왜 직접 하시지. 나한테 시키시면 되는데.’

‘관리자면 관리만 하시면 되잖아.’

지금 생각하면 미안하다. 그때 팀장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코드를 짜고 싶은데. 개발자로 남고 싶은데.

주변에서 자꾸 ‘편하게 하세요’ 한다.

그 팀장님은 2년 후에 퇴사하셨다. 스타트업으로 가셨다.

“다시 코드 짜고 싶어서.” 라고 하셨다.

당시엔 이해 못 했다. 지금은 안다.

편하게 못 한다

금요일 아침이다. 주간회의다.

준영이가 발표한다. “이번 주 스프린트 결과입니다.”

슬라이드가 넘어간다. 완료된 태스크들이 보인다.

“파트장님, 특별히 확인하실 거 있으세요?”

“아니, 잘했네. 고생했어.”

회의가 끝났다. 다들 자리로 돌아간다.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 준영이가 올린 PR을 봤다.

코드가 깔끔하다. 테스트도 있다. 주석도 있다.

근데 한 부분이 걸린다. 성능이 좀 아쉽다.

예전 같으면 바로 코멘트 달았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더 빠를 것 같은데.”

지금은 고민된다.

‘지적하면 기분 나쁘려나.’

‘아니, 그것보다 내가 직접 고치면 되는 거 아닌가.’

‘근데 내가 고치면 준영이가 뭐라 생각할까.’

결국 코멘트를 달았다. “이 부분 성능 개선 여지가 있어 보여요. 한번 같이 봐요.”

30분 후. 준영이가 답했다.

“아, 괜찮습니다. 제가 수정할게요. 파트장님은 편하게 하세요.”

또 나왔다. ‘편하게 하세요.‘

정체성이 흔들린다

내가 누군가.

20년차 개발자인가. 파트장인가. 관리자인가.

아니면 ‘예전에 개발 잘했던 사람’인가.

명함에는 ‘개발 파트장’이라고 써 있다.

근데 나는 개발을 하나.

회의 준비한다. 보고서 쓴다. 일정 조율한다. 인사평가 한다.

코드는 언제 짜나. 밤에. 혼자. 몰래.

왜 몰래 짜는 것처럼 느껴질까.

주말에 기술 블로그를 읽는다. Next.js 14 새 기능. Bun 런타임. AI 코드 생성.

읽으면서 생각한다. ‘나도 해봐야 하나.’

근데 바로 다음 생각이 온다. ‘근데 내가 언제 써보겠어.’

월요일 되면 또 회의다. 일정 체크다. 이슈 관리다.

실제로 프로덕트 코드 짜는 건 후배들이다.

나는 리뷰만 한다. 승인만 한다.

그게 내 역할이라고 회사는 말한다.

근데 나는 그게 싫다.

솔직히 말하면

저번 주 팀 회식이 있었다.

술 몇 잔 마셨다. 후배가 물었다.

“파트장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임원 되시나요?”

“글쎄. 그건 아직 모르지.”

“임원 되시면 진짜 개발은 못 하시겠네요.”

”…그렇겠지.”

집에 와서 생각했다. 나는 뭘 하고 싶은 걸까.

임원이 되고 싶은가. 아니다.

관리만 하고 싶은가. 아니다.

그럼 뭐가 하고 싶은가.

답은 명확하다. 코드를 짜고 싶다.

개발자로 남고 싶다. 45살이든 50살이든.

근데 주변은 나를 그렇게 안 본다.

‘편하게 하세요.’ 그 말 속에는 이게 들어있다.

‘당신은 이제 그 단계가 아니잖아요.’

‘우리가 할게요. 당신은 관리나 하세요.‘

화요일 오전

준영이가 내 자리로 왔다.

“파트장님, 잠깐 여쭤봐도 될까요?”

“그래, 뭔데.”

“이 부분 설계가 좀 애매해서요. 의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니터를 같이 봤다. 코드를 봤다.

“아, 이거는 말이야…”

설명을 시작했다. 왜 이렇게 하면 안 되는지. 어떻게 하는 게 나은지.

준영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직접 보여줄까?”

“아, 괜찮습니다. 설명만으로도 충분해요. 편하게 하세요.”

또 나왔다.

나는 웃었다. “아니야, 내가 짜볼게. 5분이면 돼.”

키보드를 당겼다. 코드를 짰다.

손이 기억한다. 20년이 손끝에 있다.

5분 만에 끝났다. “이렇게 하면 돼.”

준영이가 놀란 표정으로 봤다. “오, 빠르시네요.”

“20년 했으니까.”

“역시 파트장님은 다르시네요.”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아, 나는 아직 개발자구나.

답은 없다

저녁이다. 퇴근길이다.

지하철에서 생각한다.

나는 준영이가 미운 게 아니다. 오히려 고맙다.

후배들이 싫은 것도 아니다. 다들 좋은 애들이다.

근데 왜 불편한 걸까.

답은 하나다.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아니, 내 역할이 변했기 때문이다.

20년 전 나는 ‘코드 짜는 사람’이었다.

10년 전 나는 ‘코드 잘 짜는 사람’이었다.

5년 전 나는 ‘코드도 짜고 리뷰도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나는 ‘관리하는 사람’이다. 주변이 그렇게 본다.

내가 아무리 “나는 개발자야” 해도 소용없다.

파트장 명함을 들고 있는 이상. 9500만원 받는 이상.

사람들은 나를 ‘관리자’로 본다.

‘편하게 하세요.’ 그 말은 존경이다. 배려다.

근데 동시에 선 긋기다. 역할 구분이다.

‘당신은 저쪽. 우리는 이쪽.‘

어느 쪽을 선택할까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었다.

“왔어?”

“응, 왔어.”

밥을 먹었다. TV를 봤다. 씻었다.

11시다. 노트북을 켰다.

개인 프로젝트를 열었다. 아무도 모르는 프로젝트.

React로 만드는 TODO 앱. 별거 아니다.

근데 이거 짤 때가 제일 행복하다.

아무도 ‘편하게 하세요’ 안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

코드를 짰다. 한 시간. 두 시간.

눈이 감긴다. 피곤하다. 예전엔 아니었는데.

노트북을 덮었다. 침대에 누웠다.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할까.

임원이 될까. 그럼 개발은 영영 못 한다.

이직할까. 45살을 받아줄까. 연봉은 얼마나 깎일까.

프리랜서 할까. 안정성은 포기해야 한다.

답은 없다. 정답은 없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다.

나는 아직 코드를 짜고 싶다.


“편하게 하세요.” 그 말이 언젠가는 편해지려나. 아직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