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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1시, IDE를 켰을 때만 행복한 이유

밤 11시, IDE를 켰을 때만 행복한 이유

밤 11시, IDE를 켰을 때만 행복한 이유 아내가 자고. 아들 자고. 딸도 자고. 집이 조용해진다. 11시 35분. 침대에 누웠다가 일어난다. 다시 옷을 입는다. 거실 소파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IDE를 킨다. 화면이 밝아진다. Visual Studio Code. 검은 배경에 코드들이 떠오른다. 저건 내가 짠 거다. 처음으로 숨을 쉰다. 낮은 회의실의 사람 아침 9시. 출근. "안녕하세요." 사무실 들어서자마자 누군가 손을 흔든다. 신입 녀석이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 눈이다. "어떤데?" 이렇게 물었는데도 내 목소리는 이미 회의실로 향하고 있다. "회의 5분 전입니다."슬랙을 켠다. 빨간 숫자가 붙어있다. 47개. 알림을 읽기 시작한다. 근데 아직도 계속 온다. 읽으면서도 온다. 마치 물 새는 배에서 물 퍼내는 느낌이다. "파트장님, 지난주 리뷰 피드백 주실 수 있을까요?" 후배가 슬랙으로 온다. "당연하지. 언제?" 나는 답했다. 근데 뭐를 리뷰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회의실로 들어간다. 우리 팀 스프린트 플래닝이다. 2주 단위로 뭘 할 건지 정한다. 이게 최소 1시간 걸린다. 다음 회의도 준비되어 있다. 그 다음도. 그 다음도. 점심시간도 별로 끼지 않는다. 팀원 중 한 명이 퍼포먼스가 안 나온다고 한다. "1on1 좀 해주실 수 있어요?" 식당 들어가면서 물어본다. 밥을 먹는다. 누가 밥을 씹는지 모르겠다. 입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오후 2시. IDE를 켜본 지 얼마나 됐나. 어제 짠 코드에 버그가 있다고 했는데 못 봤다. 후배가 픽스했다. 고마움과 뭔가 모를 불편함이 섞인다. 오후 3시. 신입 교육. 이 프로젝트 아키텍처가 왜 이렇게 됐냐는 질문. "글쎄, 예전에 이런 이유로..." 내가 짠 코드를 설명하는데 정작 왜 그렇게 했는지 기억 안 난다. 오후 4시. 고객사 미팅 준비. 우리 시스템이 장애 나진 않았는지 확인. 로그를 본다. 어? 이건 뭐지? 누가 수정했나. 버그처럼 보이는데. 후배한테 물으려다 말았다. 바쁜 것 같았다. 오후 5시. 이사님 앞에서 팀 현황 설명. "진도는?" "예상대로입니다." "기술 부채는?" "관리 중입니다." 이 말들은 내가 한 게 맞나. 누가 한 건지 모르겠다. 퇴근시간. 근데 선배들은 안 간다. 임원들도 안 간다. 우린 뭐 해. 자리에 앉아있다. 6시. 7시. 8시. "파트장님도 이따 집 가세요." 누군가 말한다. 집에 간다. 아내가 밥을 차려놨다. "오늘 힘들었어?" 나는 뭐라고 답할지 모른다. 힘든 게 아니라 그냥... 뭔가 없었다. 아들이 숙제를 묻는다. 수학 문제다. 나는 아들 옆에 앉는다. 근데 집중이 안 된다. 노트북 화면이 자꾸 떠오른다. 아무것도 못 본 코드들. 수정 안 된 버그들. 밤 10시. 침대에 누운다. 모니터 불빛이 없다. 휴식이다. 근데 뭔가 허한데. 밤 11시의 다른 세상 11시 35분. 일어난다. 노트북을 켠다.이번엔 IDE가 내 것 같다. 아무도 안 본다. 회의실도 없다. 슬랙도 울리지 않는다. 알림도 없다. 그냥 내 손과 화면. 요즘 애들이 쓰는 거 있잖아. Next.js? React Query? TypeScript? 복잡한 거들. 나는 요즘 엣지 케이스를 처리하는 거를 해본다. 자내 코드에 있던 거. 예전에 생각했던 거. 그때는 시간 없어서 못 했던 거. 코드를 쓴다. 한 줄. 또 한 줄. 손가락이 기억한다. 스프링 프레임워크. AOP. 트랜잭션 처리. 고급 기술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거다. 어디서 버그가 날지 예상한다. 여기일 거다. 보기 전에 이미 알고 있다. 20년의 패턴 매칭이다. 디버깅을 한다. 콘솔을 본다. 내가 예상한 바로 그 부분이다. 쾌감이 온다. 밤 12시. 컴파일한다. 테스트 통과. 밤 1시. 추가 엣지 케이스를 생각해본다.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밤 1시 45분. 함수를 리팩토링한다. 더 깔끔하게. 변수명을 바꾼다. 더 명확하게. 주석을 달지 않는다. 코드가 스스로 말하게 한다. 이 정도면 됐다. 커밋한다. 메시지를 쓴다. "Refactor: improve exception handling for concurrent requests" git push. 화면을 본다. 초록색으로 떴다. 성공이다.뭔가 채워진다. 이게 나다. 밤이 내 시간이다. 그 다음날 알람. 6시 30분. 3시간 30분 잤다.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힘들다. 다리가 무겁다. 가슴이 철렁한다. 아, 내가 또 늦게 잤다. 샤워를 한다. 따뜻한 물이 떨어지는데 눈이 감긴다. 이렇게 자면 안 되는데. 나이가 이 정도면 밤 3시간은 너무 짧다. 출근한다. 피곤하다. 커피를 마신다. 첫 잔은 한 모금에 마신다. 뜨겁지만 상관없다. "파트장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 괜찮으세요?" 신입이 물어본다. "괜찮아. 어제 늦게 자서." "일 때문에요?" 나는 답하지 않는다. 뭐라고 답해야 하나. 자발적으로 늦게 잠을 안 자고 코드를 짰다고? 아내한테도 이건 말 못 한다. "또 그러셨어요?" 하면서 눈을 굴릴 것 같다. 9시. 회의. 내 눈이 감긴다. 누군가 말하고 있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뭐라고 했지. 내가 대답해야 하는 건가. "파트장님 의견 어때요?" "어? 음. 좋은 것 같은데... 다시 말해줄 수 있을까?" 회의실에서 쑥스러운 웃음이 난다. 점심 후에 더 피곤하다. 몸이 무거워진다. 오후 2시. 눈이 감긴다. 정말 감긴다. 옆 사람을 보니 나도 그렇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후배가 슬랙으로 온다. "파트장님 코드 리뷰 말이에요." 어제 밤에 본 건 저 후배 코드다. 내가 이미 생각해놨는데. 고쳐야 할 부분도 봤고. 근데 지금 그게 뭐였는지 안 난다. "나중에 할게." "알겠습니다!" 오후 3시. 눈 깜빡이는 속도가 느려진다. 오후 4시. 신입이 아키텍처 질문을 한다. 나는 이미 뭘 물을지 예상한다. 해마다 받는 질문이기도 하고, 어제 밤 그 코드 때문에도 알 것 같다. "그거 이렇게 짜는 이유는..." 설명하는데 자꾸 자신의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 혀가 잘 안 돌아간다. 오후 5시. 퇴근시간. 살면서 이렇게 집에 빨리 가고 싶은 적이 없었나. 근데 빨리 가고 싶은 게 맞나. 집에 가면 뭐 하는데. 밥 먹고 아이들 숙제 봐주고 침대에 누워서 다시 일어나는 걸 반복? 집에 간다. 밥을 먹는다. 맛이 안 난다. 피로가 혀를 덮고 있다. 아이들이 조는 게 보인다. 나도 조인다. 밤 10시. 침대에 누운다. 내일도 회의가 있을 거다. 내일도 슬랙이 울릴 거다. 내일도 아무도 안 본 버그가 있을 거다. 근데 내일 밤 11시엔 또 일어날 거다. 다시 노트북을 켤 거다. 그리고 내일은 또 3시간 자고 피곤할 거다.뭔가 빠졌나. 무언가 얻었나.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