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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
- 05 Dec, 2025
MZ 후배들의 칼같은 퇴근 시간, 부럽고 야속한 이유
6시 10분 퇴근 시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 퇴근 시간은 아니다. 신입 김대리가 가방을 챙긴다. 6시 5분이다. 노트북 덮고, 슬랙 상태 '자리비움'으로 바꾸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동선이 깔끈하다. 연습한 것처럼.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내 대답도 연습한 것처럼 자연스럽다. 이제 익숙하다. 3년 전만 해도 달랐다. 6시에 가방 챙기는 후배 보면 속으로 '저게 뭐야' 했다. 입 밖으로는 안 냈지만. 지금은 그냥 당연하다. 아니, 당연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한다.창밖을 본다. 아직 해가 있다. 6월이니까. 나는 9시쯤 나갈 것이다. 특별한 일 없어도. 습관이다. 나 때는 2005년이었다. 신입사원 박시니어. 첫 출근. 선배가 말했다. "우리 팀은 10시 출근 10시 퇴근이야. 참고로 오전 10시, 저녁 10시." 웃으면서 했던 말인데 농담이 아니었다. 진짜로 밤 10시에 퇴근했다. 매일. 금요일도. 야근 수당? 없었다. 대신 야식은 나왔다. 치킨이나 족발. 밤 9시쯤 시켜 먹으면서 '이거라도 건지는 거지' 했다. 주말 출근도 많았다. 특히 배포 있는 주는 거의 확정. 토요일 오전에 나와서 배포하고, 모니터링하고, 오후 5시쯤 퇴근. 그게 일상이었다. 불만? 당연히 있었다. 근데 다들 그랬다. 선배들도, 동기들도. '원래 그런 거' 였다.그렇게 10년을 했다. 20대가 다 갔다. 연애? 주말에 했다. 결혼? 30 넘어서 했다. 아이? 35에 낳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깝다. 그 시간. 근데 그땐 몰랐다. 다들 그러니까. 변화의 시작 2018년쯤부터였나. 신입들이 달랐다. 면접 볼 때부터 물어봤다. "야근 많나요?" "주말 출근 있나요?" "워라밸은 어떤가요?" 처음엔 당황했다. '이걸 면접에서 물어?' 싶었다. 근데 점점 많아졌다. 이제는 안 물어보는 애가 이상한 정도. 그리고 입사하면 진짜로 6시에 퇴근했다. 일 끝나면. 아니, 일 안 끝나도. "내일 하면 안 되나요?" 처음 들었을 때 할 말이 없었다. 안 된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급한 거 아니면. 팀장들 모임에서 얘기 나왔다. "요즘 애들 야근 안 하더라." "주말 출근 부탁하면 거절해."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 다들 비슷했다. 불만 반, 부러움 반. 부럽다 솔직히 부럽다. 김대리는 저녁 7시면 헬스장 간다. 주 3회. 몸도 좋다. 나는 헬스장 등록만 3번 했다. 한 번도 석 달 못 채웠다. 이과장은 퇴근하고 영어 학원 다닌다. 회사 돈으로. 근데 진짜 실력 늘었다. 지난번 화상회의 때 영어로 프레젠테이션 하는 거 봤다. 나보다 잘한다. 최주임은 주말마다 등산 간다. SNS에 사진 올린다. 정상에서 찍은 셀카. 맑은 눈. 나는 주말에 소파에서 넷플릭스 본다. 아니면 잔다.부럽다. 20대를 제대로 사는 것 같아서. 나는 20대를 회사에 줬다. 돌려받은 건 경력과 연봉. 나쁘지 않다. 근데 가끔 아깝다. 지금 김대리 나이 때 나는 뭐 했나. 코딩하고, 야근하고, 치킨 먹고. 그게 다였나. 야속하다 근데 야속하기도 하다. 프로젝트 데드라인 코앞인데 6시에 퇴근하는 거 보면. 솔직히 화난다. 참는다. 티 안 낸다. 근데 속으로는 '저게 뭐야' 한다. "내일까지인데 오늘 좀 더 하면 안 돼?"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요. 내일 아침 일찍 와서 하겠습니다." 약속. 친구 만나는 거래. 급한 것도 아니고. 참았다. '내가 꼰대가 되는 건가' 싶어서. 근데 다음 날 아침. 10시에 출근했다. 일찍 온다며? 코어타임이 10시니까 지각은 아니래. 그날 저녁에 내가 야근했다. 12시까지. 혼자. 다음 날 김대리한테 말했다. "어제 내가 마무리했어." "아, 감사합니다. 제가 했어야 하는데." 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저녁 6시 10분. 퇴근했다. 역시. 내가 틀렸나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야근한 20년. 그게 맞았나. 회사는 내게 연봉 줬다. 경력 줬다. 파트장 직함 줬다. 공정한 거래 아닌가. 근데 내 20대는 안 줬다. 건강도 안 줬다. 작년 건강검진에서 지방간 나왔다. 허리디스크도 있다. 아내한테 물어봤다. "당신은 어때? 요즘 젊은 애들." "부러워. 나도 저렇게 살고 싶었어." "우리 때랑 다르지?" "다르지. 근데 걔네가 맞는 것 같아."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우리가 틀렸던 건가. 아니면 시대가 바뀐 건가. 파트장의 딜레마 요즘 고민이다. 팀원 8명. 반은 MZ. 반은 30대 후반. MZ는 칼퇴근. 30대는 눈치 본다. 어정쩡하게. 박차장이 물어봤다. "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6시 퇴근." "나쁘지 않지. 일 끝나면." "근데 다 같이 있어야 할 때도 있잖아요." "그때는 부탁해야지." "부탁하면 거절하던데요." 할 말이 없었다. 관리자로서는 난감하다. 프로젝트는 돌아가야 하는데, 강제할 수도 없고. 근데 개발자로서는 이해한다. 나도 6시에 퇴근하고 싶다. 이게 파트장의 딜레마다. 세대 차이 지난주 회식 때였다. 김대리가 물어봤다. "팀장님은 왜 매일 늦게 퇴근하세요?" "일이 있어서." "내일 해도 되는 일 아닌가요?" 순간 뜨끔했다. 솔직히 맞는 말이었다. "습관이야. 오래 된." "불편하지 않으세요?" "익숙해서 안 불편해." 거짓말이었다. 불편하다. 매일. 이과장이 끼어들었다. "저희 세대는 달라요. 일은 일, 삶은 삶." "부럽네." "팀장님도 하시면 되잖아요." 안 된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안 된다. 바뀌려고 노력 중 작심삼일을 여러 번 했다. '이번 주는 7시에 퇴근하자' - 화요일에 포기. '주말은 쉬자' - 토요일 오전에 출근. '연차 다 쓰자' - 올해도 5일 남았다. 12월인데. 안 된다. 몸이 안 움직인다. 근데 조금씩 바뀌는 것 같기도 하다. 요즘은 후배들 6시 퇴근할 때 '잘 가' 한다. 진심으로. 금요일엔 먼저 말한다. "주말 출근 없으니까 푹 쉬어." 회의 시간도 줄였다. 1시간 회의 30분으로. 30분 회의 15분으로. 급하지 않은 슬랙은 '내일 답장해도 돼' 라고 쓴다. 작은 변화지만 변화다. 인정하는 중 받아들이기로 했다. MZ의 칼퇴근. 그게 맞다. 우리가 틀렸다. 일과 삶의 균형. 듣기만 해도 좋다. 나도 하고 싶다. 부럽고 야속한 감정. 그게 내 문제다. 걔네 문제 아니다. 바뀌려고 노력 중이다. 천천히. 어제는 8시에 퇴근했다. 9시보다 1시간 빨랐다. 오늘은 7시 반 목표다. 언젠가는 나도 6시에 퇴근할까. 모르겠다. 근데 해보려고 한다. 후배들이 부럽다. 솔직히. 많이. 그래도 괜찮다. 부러워하는 거. 인정하는 게 시작이니까.오늘도 9시 퇴근. 목표는 7시 반이었는데. 내일은 진짜 해보자. 아마도.
- 04 Dec, 2025
30대는 밤새 코딩했는데, 45세 이후는 10시 반이면 지쳐
10시 반이면 지친다 새벽 3시의 추억 30대 때는 가능했다. 새벽 3시까지 코딩하고 4시간 자고 출근. 점심에 캔커피 한 잔 마시면 또 밤까지 버텼다. 지금은 10시 반만 넘으면 모니터가 흐릿해진다. 눈이 먼저 포기한다. 키보드 두드리는 손가락도 느려진다. 어제 긴급 배포가 있었다. 밤 11시까지 작업했다. 집에 가서 씻고 누웠는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은 새벽 2시에나 들었다. 오늘 아침 8시 알람이 울렸다. 몸이 안 일어났다. 5분만 더, 5분만 더 하다가 9시에 눈 떴다. 회사 도착은 10시.점심 먹고 오후 회의. 1시간 내내 졸았다. 파트원이 발표하는데 내용이 하나도 안 들어왔다. 커피를 세 잔 마셨다. 소용없었다. 저녁 6시. 드디어 코딩할 시간. IDE를 켰다. 화면을 봤다. 집중이 안 됐다. 30분 동안 10줄 짰다. 지웠다. 다시 짰다. 체력은 거짓말을 안 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44세와 45세의 차이가 이렇게 큰지 몰랐다. 주말에 농구하던 걸 끊었다. 월요일에 출근 못 할 것 같아서. 계단 오르면 숨이 찬다. 우리 사무실은 7층인데 엘리베이터가 느려서 가끔 걸어 올라갔었다. 이제는 무조건 엘리베이터다. 점심 먹고 나면 졸립다. 예전에는 안 그랬다. 요즘은 화장실 가서 변기 뚜껑 닫고 10분 눈 붙인다. 타이머 맞춰놓고. 안 그러면 오후를 못 버틴다.후배 김대리가 물었다. "파트장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안 좋으신데." "어, 그래? 괜찮아. 어제 좀 늦게 잤어." "요즘 야근 많으시죠? 저희가 더 할 수 있는데." 고맙긴 한데. 내가 안 하면 불안하다. 그게 더 문제다. 야근의 대가 월요일에 야근했다. 화요일 아침에 일어났는데 온몸이 뻐근했다. 목이 돌아가지 않았다. 파스를 붙이고 출근했다. 화요일에 또 야근했다. 수요일은 하루 종일 멍했다. 회의 때 내가 뭔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점심 메뉴도 기억 안 난다. 수요일 저녁에 와이프가 말했다. "여보, 요즘 너무 피곤해 보여. 좀 쉬어." "다음 주 배포 끝나면 쉴게." "지난주에도 그렇게 말했잖아." 맞는 말이다. 목요일 오후 3시. 갑자기 어지러웠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휘청했다. 벽을 짚었다. 옆자리 이대리가 놀라서 물었다. "파트장님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잠깐 어지러웠어." "병원 가보세요." "아니야,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 9시 사무실에 나 혼자 남았다. 팀원들은 다 퇴근했다. 6시 반에. 칼퇴했다. 나는 아직 코딩 중이다. 리팩토링하고 있다. 이 코드가 맘에 안 든다. 3년 전에 내가 짠 건데 지금 보니까 엉망이다. 시계를 봤다. 9시 10분. 배가 고프다. 점심 이후로 아무것도 안 먹었다. 사무실 서랍에 초코바가 있다. 꺼내서 먹었다.모니터가 흐릿해진다. 눈을 비볐다. 코드가 안 보인다. 아니다. 보이는데 이해가 안 된다. 내가 뭘 짜고 있었지? 저장하고 껐다. 집에 가야겠다. 일어서려는데 다리에 힘이 없다. 의자를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 가방을 챙겼다. 노트북을 넣었다. 무겁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 누가 봐도 피곤해 보인다. 45세 개발자의 얼굴이다. 30대는 돌아오지 않는다 30대 때는 체력이 자산인 줄 몰랐다. 무한정 쓸 수 있는 줄 알았다. 밤새 코딩하고 아침에 헬스장 가고 저녁에 술 마시고. 다음 날 멀쩡했다. 35세까지는 그랬다. 36세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술 마신 다음 날 힘들어졌다. 38세에는 야근하면 이틀이 갔다. 40세 넘어서는 주말에 쉬어야 월요일을 버텼다. 42세에 건강검진 받았다. 의사가 말했다. "혈압이 높네요. 스트레스 받으세요?" "개발자인데요." "아, 그러시구나. 운동 좀 하세요." 운동할 시간이 어딨나. 43세에 허리가 아팠다. 디스크 초기래. 물리치료 3개월 받았다. 지금도 가끔 아프다. 의자에 오래 앉아있으면. 44세에는 눈이 침침했다. 안경을 바꿨다. 도수를 올렸다. 모니터 보는 시간을 줄이라고 했다. 불가능하다. 45세인 지금. 10시 반이면 지친다. 그래도 코딩은 해야 하는데 관리 업무만 하면 편할까. 아니다. 더 답답하다. 회의만 하고, 보고서만 쓰고, 일정만 관리하면. 그게 개발자인가. 파트장이라는 직함이 붙었지만 나는 개발자다. 코드를 짜야 개발자다. 근데 체력이 안 따라준다. 이게 문제다. 오전에는 회의. 오후에는 이메일 답장하고 코드리뷰하고 1on1 하고. 실제로 코딩할 시간은 저녁 이후다. 그때는 이미 지쳐있다. 주말에 하면 되지 않냐고? 주말에는 가족이 있다. 아들 학원 데려다주고 딸 학교 행사 가고 와이프랑 마트 가고. 그것도 해야 한다. 틈틈이 기술 공부도 해야 한다. 요즘 애들이 쓰는 거 모르면 뒤처진다. Next.js도 봐야 하고 Rust도 봐야 하고 Kubernetes도 제대로 공부해야 하고. 시간은 24시간인데 해야 할 건 48시간 치다. 체력은 12시간 치다. 현실을 인정하는 중 어제 새벽에 잠이 안 와서 유튜브를 봤다. 개발자 유튜버가 말했다. "40대 개발자는 체력 관리가 중요합니다." 맞는 말이다. 근데 어떻게 관리하나. 운동? 시간이 없다. 식단 관리? 점심은 회사 구내식당이고 저녁은 편의점이다. 수면? 11시에 자면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하고 새벽 1시에 자면 수면 시간이 부족하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건 야근을 줄이는 것뿐이다. 근데 그러면 일이 안 끝난다. 팀원들한테 더 시킬 수도 없다. 다들 자기 일도 바쁘다. 결국 나한테 돌아온다. 파트장이니까. 책임자니까. 그래서 야근한다. 체력이 딸려도 한다. 다음 날 피곤해도 한다. 그게 내 일이니까. 근데 이게 맞나 싶다. 45세에 이렇게 살아야 하나. 50세 되면 어떻게 하나. 55세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나. 답은 없다. 알고 있다. 오늘도 10시 반 지금 시각 10시 27분. 졸립다. 코드를 짜고 있는데 집중이 안 된다. 이 함수를 왜 짜고 있는지 까먹었다. 위로 스크롤해서 주석을 읽었다. 아, 맞다. 이거 하고 있었지. 다시 코드를 짠다. 5줄 짰다. 컴파일 에러. 오타다. 고쳤다. 다시 컴파일. 성공. 테스트 코드를 돌렸다. 실패. 로직이 틀렸다. 어디가 틀렸지. 디버거를 켰다. 한 줄씩 따라갔다. 아, 여기다. 고쳤다. 다시 테스트. 성공. 시계를 봤다. 10시 43분. 16분 동안 한 일이 이게 다다. 30대 때는 5분이면 끝났을 일. 저장하고 푸시했다. 노트북을 껐다. 가방을 챙겼다. 내일도 10시 반이면 지칠 것이다. 모레도. 다음 주도. 그래도 출근한다. 코딩한다. 개발자니까. 45세 개발자의 하루는 그렇다.체력은 거짓말을 안 한다. 45세의 10시 반은 30대의 새벽 3시보다 힘들다.
- 03 Dec, 2025
기술 면접관이 된 후 느낀 불안감
기술 면접관이 된 후 느낀 불안감 면접관석에 앉다 작년부터 면접관으로 들어간다. 파트장이 되면서 당연한 수순이다. 첫 면접 전날 밤, 예상 질문 리스트를 정리했다. Java 기초, Spring 동작 원리, DB 최적화. 내가 20년간 써먹은 것들이다. "괜찮아, 이 정도는 눈 감고도." 그렇게 생각했다.첫 번째 당황 면접장에 들어온 지원자는 27살. 이력서에 적힌 기술 스택을 보는 순간 식은땀이 났다. Rust, Go, Kubernetes, GraphQL, Next.js. "아... 이거 하나도 안 써봤는데." 일단 내가 아는 걸로 시작했다. "Spring으로 RESTful API 설계해보셨어요?" "네, 근데 요즘은 GraphQL을 더 선호해서요." GraphQL. 들어는 봤다. REST의 단점을 보완한다는 건 안다. 근데 실무에서 어떻게 쓰는지는 모른다. "아, GraphQL. 좋죠. 어떤 점이 좋던가요?" 지원자가 10분간 설명했다. Over-fetching, Under-fetching, Schema, Resolver.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질문은 못 했다. 무슨 질문을 해야 할지 몰랐다.역전된 시간 면접이 끝났다. 옆에 앉은 30대 후배가 물었다. "형, GraphQL 괜찮은 것 같지 않아요?" "응, 근데 우리 프로젝트에 당장은..." 변명이었다. 사실은 잘 모르니까 도입이 무섭다. 우리 팀에 아는 사람도 없다. 레퍼런스 찾아보려면 시간도 들고. 그날 저녁, 유튜브로 GraphQL 강의를 봤다. 40분짜리 영상. 10분 보다가 껐다. 피곤했다. "내일 보자." 그 내일이 아직도 안 왔다. 두 번째 면접, 더 큰 문제 한 달 후 또 면접. 이번엔 5년차 개발자. 이력서에 "대규모 트래픽 처리 경험" 이라고 적혀 있었다. "일 평균 트래픽이 어느 정도였나요?" "DAU 300만, 피크 시간대 초당 5만 요청이요." 오... 우리 서비스는 많아야 1만이다. 좀 쫄렸다. "어떻게 처리하셨어요?" "Redis 클러스터 구성하고, Kafka로 비동기 처리했습니다." Redis는 안다. 캐시다. 근데 클러스터는 이론으로만 알지 직접 구성은 안 해봤다. Kafka는... 이름만 들어봤다. "Kafka 도입 과정에서 어려움은?" 질문은 했는데 대답을 이해 못 했다. Partition, Consumer Group, Offset. 모르는 단어가 3개나 나왔다. "아... 네네. 잘 처리하셨네요." 면접 끝나고 평가서에 뭐라고 쓸까 고민했다. "기술적으로 우수함" 이라고 썼다. 근데 속으로는 "나보다 잘하는 것 같음" 이었다.폭과 깊이 그날 밤 생각했다. 나는 Java를 깊이 판다고 생각했다. JVM 동작 원리, GC 튜닝, 동시성 제어. 이 정도면 시니어 맞지 않나. 근데 요즘 개발은 폭이 필요하다. 프론트도 알아야 하고. 인프라도 알아야 하고. 새로운 언어도 따라가야 하고. 나는 깊이만 팠다. 20년간 Java만. 폭은 좁았다. 후배들은 다르다. 5년 안에 Python, Go, TypeScript 다 써본다. Docker, Kubernetes도 당연히 안다. 클라우드도 익숙하다. "이게 맞나?" 깊이 없이 넓기만 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근데 면접 보면서 느낀 건. 그들의 깊이도 만만치 않더라. 면접관 자격 요즘 면접 들어갈 때마다 불안하다. "오늘은 무슨 기술이 나올까." "모르는 거 나오면 어떻게 대처하지." 면접관이 지원자한테 배우는 꼴이다. 이게 맞나. 옆 팀 박 차장은 더 심하다. 그분은 나보다 2년 선배다. 얼마 전에 면접 끝나고 하소연했다. "야, 요즘 애들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저도요." "우리 늙은 건가." "아직 45인데요." "개발자로는 늙은 거지." 씁쓸했다. 검색하는 면접관 요즘은 이력서 받으면 일단 검색한다. 모르는 기술 스택 전부. 간단하게라도 개념은 알고 들어가야 한다. 지난주 면접 전날. Rust 공부했다. 2시간 투자해서 기초 문법 봤다. "메모리 안전성, 소유권 개념." 이 정도만 알고 들어갔다. 면접 중에 "Rust 써보신 이유는?" 물었다. "C++의 메모리 안전성 문제를 해결하면서 성능도 유지할 수 있어서요." "맞아요, 소유권 시스템이 핵심이죠?" "네, Borrow Checker 덕분에 컴파일 타임에 잡히니까요." Borrow Checker. 전날 못 본 내용이다. 또 모른다. "좋네요, 실무에서 어떻게 활용하셨어요?" 대충 넘어갔다. 면접 끝나고 또 검색했다. Borrow Checker. 공부할 게 끝이 없다. 깊이의 착각 생각해보면 나도 착각했다. Java 20년 했다고 다 아는 건 아니다. Virtual Thread 나왔을 때 개념도 몰랐다. Spring WebFlux도 제대로 안 써봤다. Reactive Programming은 이론만 안다. 깊이를 판 게 아니라. 익숙한 것만 계속 쓴 거다. 새로운 Java 기능도 안 쓴다. "레거시 코드가 많아서." "마이그레이션 비용이 커서." 핑계다. 그냥 배우기 귀찮은 거다. 체력도 떨어지고. 새로운 거 배우면 머리 아프고. 그러는 사이 후배들은 계속 배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게 새로운 거니까. 배우는 게 당연하니까. 역질문 시간 면접 끝나고 "질문 있으세요?" 하면. 요즘은 내가 더 궁금하다. "이 기술 도입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레퍼런스가 적어서 어떻게 공부하셨어요?" "주변에 아는 사람 없으면 어떻게 해결하세요?" 면접관이 물어볼 질문이 아니다. 근데 진짜 궁금하다. 어떤 지원자는 대답해준다. 친절하게. 마치 선생님처럼. "공식 문서 먼저 보고요, 안 되면 해외 포럼이요." "Discord 커뮤니티 들어가면 다들 잘 알려줘요." "일단 해보면서 삽질하는 게 제일 빠르더라고요." 나는 공식 문서 보면 영어에서 막힌다. Discord는 뭔지 잘 모른다. 삽질할 시간은 없다. 세대 차이다. 합격 통보의 무게 면접 평가회의 때마다 고민이다. 내가 제대로 평가한 건가. 이 사람이 실력자인지 아닌지. 판단할 자격이 내게 있나. 결국 다른 면접관들 의견을 따른다. "30대 후배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겠지." "기술 질문 잘 받아쳤으면 실력 있는 거겠지." 내 판단은 점점 줄어든다. 면접관인데. 합격 통보하고 나면 불안하다. "이 사람 들어와서 나한테 뭐 물어보면 어떡하지." "내가 리드할 수 있을까." 파트장인데 말이다. 관리자의 핑계 회사는 말한다. "파트장은 기술보다 관리가 중요합니다." "팀원들이 잘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기술은 팀원들이 캐치업하면 됩니다." 맞는 말이다. 근데 씁쓸하다. "기술 못 따라가도 괜찮아, 넌 관리자니까." 이렇게 들린다. 관리만 하는 개발자. 코드는 못 짜는 개발자. 후배들 실력은 못 따라가는 개발자. 그게 나다. 면접 볼 때마다 확인한다. "아, 나 진짜 뒤처졌구나." 불안의 정체 왜 불안할까. 생각해봤다. 첫째, 권위가 무너진다. 20년차 시니어인데 모르는 게 많다. 후배들이 알면 어떡하나. 둘째, 자리가 불안하다. 관리만 하는 개발자는 언제든 교체 가능하다. 기술 없으면 경쟁력 없다. 셋째, 자존심 상한다. 후배한테 배운다는 게. 면접에서 질문 못 한다는 게. 결국 다 자아 문제다. 실력은 둘째고. 내 위치, 내 자존심이 먼저다. 한심하다. 인정의 시작 지난주 면접 후 솔직하게 물어봤다. 27살 지원자에게. "저는 GraphQL 안 써봤거든요. 3분만 설명해주실 수 있어요?" 당황하더라. 면접관이 질문받는 상황. 근데 설명해줬다. 친절하게. 이해하기 쉽게.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네요." 그 사람 합격시켰다. 우리 팀에 꼭 필요하다. 내가 모르는 걸 아니까. 면접 끝나고 30대 후배가 말했다. "형, 솔직하게 물어보시는 거 멋있었어요." "아니, 그냥 진짜 몰라서." "그래도 인정하고 배우려는 게 쉽지 않잖아요." 위로인지 칭찬인지 모르겠다. 근데 조금 편해졌다. 바뀐 면접 방식 요즘은 면접 스타일을 바꿨다. 모르는 기술 나오면 솔직하게 말한다. "이 기술은 저도 안 써봤는데, 어떤 점이 좋은가요?" "실무에서 어떻게 적용하셨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질문이 아니라 학습이다. 면접인지 세미나인지 모를 때도 있다. 근데 이게 더 낫다. 지원자 실력도 제대로 보인다. 설명 잘하는 사람이 실력자다. 아는 척하는 사람은 금방 티 난다. 그리고 나도 배운다. 한 번에 하나씩. GraphQL, Rust, Kafka. 면접 볼 때마다 하나씩 는다. 느리지만 방법이다. 시니어의 역할 요즘 생각이 바뀌었다. 시니어는 모든 기술을 다 알아야 하는 게 아니다. 어떤 기술이 필요한지 판단하는 게 중요하다. 면접에서 지원자가 Rust 얘기하면. "우리 프로젝트에 Rust가 필요할까?" 를 생각한다. 성능이 중요한가. 메모리 안전성이 핵심인가. 팀원들이 러닝 커브를 감당할 수 있나. 이건 5년차는 못 한다. 20년 경험이 필요하다. 기술은 몰라도 된다. 판단력은 있어야 한다. 그렇게 자위한다. 매일. 다음 면접 다음 주에 또 면접이다. 이력서 받았다. 이번엔 Python 머신러닝 경험자. 모른다. Python은 문법만 안다. 머신러닝은 완전 초짜다. 주말에 공부해야 한다. "머신러닝 기초" 유튜브 영상. 1시간짜리. 볼 수 있을까. 아들이 "아빠 게임하자" 할 텐데. 일단 저장해놨다. "나중에 보기" 목록에. 거기 영상이 벌써 37개다. 다 못 본다. 알지만 계속 저장한다. 불안하니까.면접관석은 생각보다 불편하다. 판단하는 사람인데 확신은 없다.
- 02 Dec, 2025
밤 11시, IDE를 켰을 때만 행복한 이유
밤 11시, IDE를 켰을 때만 행복한 이유 아내가 자고. 아들 자고. 딸도 자고. 집이 조용해진다. 11시 35분. 침대에 누웠다가 일어난다. 다시 옷을 입는다. 거실 소파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IDE를 킨다. 화면이 밝아진다. Visual Studio Code. 검은 배경에 코드들이 떠오른다. 저건 내가 짠 거다. 처음으로 숨을 쉰다. 낮은 회의실의 사람 아침 9시. 출근. "안녕하세요." 사무실 들어서자마자 누군가 손을 흔든다. 신입 녀석이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 눈이다. "어떤데?" 이렇게 물었는데도 내 목소리는 이미 회의실로 향하고 있다. "회의 5분 전입니다."슬랙을 켠다. 빨간 숫자가 붙어있다. 47개. 알림을 읽기 시작한다. 근데 아직도 계속 온다. 읽으면서도 온다. 마치 물 새는 배에서 물 퍼내는 느낌이다. "파트장님, 지난주 리뷰 피드백 주실 수 있을까요?" 후배가 슬랙으로 온다. "당연하지. 언제?" 나는 답했다. 근데 뭐를 리뷰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회의실로 들어간다. 우리 팀 스프린트 플래닝이다. 2주 단위로 뭘 할 건지 정한다. 이게 최소 1시간 걸린다. 다음 회의도 준비되어 있다. 그 다음도. 그 다음도. 점심시간도 별로 끼지 않는다. 팀원 중 한 명이 퍼포먼스가 안 나온다고 한다. "1on1 좀 해주실 수 있어요?" 식당 들어가면서 물어본다. 밥을 먹는다. 누가 밥을 씹는지 모르겠다. 입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오후 2시. IDE를 켜본 지 얼마나 됐나. 어제 짠 코드에 버그가 있다고 했는데 못 봤다. 후배가 픽스했다. 고마움과 뭔가 모를 불편함이 섞인다. 오후 3시. 신입 교육. 이 프로젝트 아키텍처가 왜 이렇게 됐냐는 질문. "글쎄, 예전에 이런 이유로..." 내가 짠 코드를 설명하는데 정작 왜 그렇게 했는지 기억 안 난다. 오후 4시. 고객사 미팅 준비. 우리 시스템이 장애 나진 않았는지 확인. 로그를 본다. 어? 이건 뭐지? 누가 수정했나. 버그처럼 보이는데. 후배한테 물으려다 말았다. 바쁜 것 같았다. 오후 5시. 이사님 앞에서 팀 현황 설명. "진도는?" "예상대로입니다." "기술 부채는?" "관리 중입니다." 이 말들은 내가 한 게 맞나. 누가 한 건지 모르겠다. 퇴근시간. 근데 선배들은 안 간다. 임원들도 안 간다. 우린 뭐 해. 자리에 앉아있다. 6시. 7시. 8시. "파트장님도 이따 집 가세요." 누군가 말한다. 집에 간다. 아내가 밥을 차려놨다. "오늘 힘들었어?" 나는 뭐라고 답할지 모른다. 힘든 게 아니라 그냥... 뭔가 없었다. 아들이 숙제를 묻는다. 수학 문제다. 나는 아들 옆에 앉는다. 근데 집중이 안 된다. 노트북 화면이 자꾸 떠오른다. 아무것도 못 본 코드들. 수정 안 된 버그들. 밤 10시. 침대에 누운다. 모니터 불빛이 없다. 휴식이다. 근데 뭔가 허한데. 밤 11시의 다른 세상 11시 35분. 일어난다. 노트북을 켠다.이번엔 IDE가 내 것 같다. 아무도 안 본다. 회의실도 없다. 슬랙도 울리지 않는다. 알림도 없다. 그냥 내 손과 화면. 요즘 애들이 쓰는 거 있잖아. Next.js? React Query? TypeScript? 복잡한 거들. 나는 요즘 엣지 케이스를 처리하는 거를 해본다. 자내 코드에 있던 거. 예전에 생각했던 거. 그때는 시간 없어서 못 했던 거. 코드를 쓴다. 한 줄. 또 한 줄. 손가락이 기억한다. 스프링 프레임워크. AOP. 트랜잭션 처리. 고급 기술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거다. 어디서 버그가 날지 예상한다. 여기일 거다. 보기 전에 이미 알고 있다. 20년의 패턴 매칭이다. 디버깅을 한다. 콘솔을 본다. 내가 예상한 바로 그 부분이다. 쾌감이 온다. 밤 12시. 컴파일한다. 테스트 통과. 밤 1시. 추가 엣지 케이스를 생각해본다.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밤 1시 45분. 함수를 리팩토링한다. 더 깔끔하게. 변수명을 바꾼다. 더 명확하게. 주석을 달지 않는다. 코드가 스스로 말하게 한다. 이 정도면 됐다. 커밋한다. 메시지를 쓴다. "Refactor: improve exception handling for concurrent requests" git push. 화면을 본다. 초록색으로 떴다. 성공이다.뭔가 채워진다. 이게 나다. 밤이 내 시간이다. 그 다음날 알람. 6시 30분. 3시간 30분 잤다.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힘들다. 다리가 무겁다. 가슴이 철렁한다. 아, 내가 또 늦게 잤다. 샤워를 한다. 따뜻한 물이 떨어지는데 눈이 감긴다. 이렇게 자면 안 되는데. 나이가 이 정도면 밤 3시간은 너무 짧다. 출근한다. 피곤하다. 커피를 마신다. 첫 잔은 한 모금에 마신다. 뜨겁지만 상관없다. "파트장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 괜찮으세요?" 신입이 물어본다. "괜찮아. 어제 늦게 자서." "일 때문에요?" 나는 답하지 않는다. 뭐라고 답해야 하나. 자발적으로 늦게 잠을 안 자고 코드를 짰다고? 아내한테도 이건 말 못 한다. "또 그러셨어요?" 하면서 눈을 굴릴 것 같다. 9시. 회의. 내 눈이 감긴다. 누군가 말하고 있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뭐라고 했지. 내가 대답해야 하는 건가. "파트장님 의견 어때요?" "어? 음. 좋은 것 같은데... 다시 말해줄 수 있을까?" 회의실에서 쑥스러운 웃음이 난다. 점심 후에 더 피곤하다. 몸이 무거워진다. 오후 2시. 눈이 감긴다. 정말 감긴다. 옆 사람을 보니 나도 그렇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후배가 슬랙으로 온다. "파트장님 코드 리뷰 말이에요." 어제 밤에 본 건 저 후배 코드다. 내가 이미 생각해놨는데. 고쳐야 할 부분도 봤고. 근데 지금 그게 뭐였는지 안 난다. "나중에 할게." "알겠습니다!" 오후 3시. 눈 깜빡이는 속도가 느려진다. 오후 4시. 신입이 아키텍처 질문을 한다. 나는 이미 뭘 물을지 예상한다. 해마다 받는 질문이기도 하고, 어제 밤 그 코드 때문에도 알 것 같다. "그거 이렇게 짜는 이유는..." 설명하는데 자꾸 자신의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 혀가 잘 안 돌아간다. 오후 5시. 퇴근시간. 살면서 이렇게 집에 빨리 가고 싶은 적이 없었나. 근데 빨리 가고 싶은 게 맞나. 집에 가면 뭐 하는데. 밥 먹고 아이들 숙제 봐주고 침대에 누워서 다시 일어나는 걸 반복? 집에 간다. 밥을 먹는다. 맛이 안 난다. 피로가 혀를 덮고 있다. 아이들이 조는 게 보인다. 나도 조인다. 밤 10시. 침대에 누운다. 내일도 회의가 있을 거다. 내일도 슬랙이 울릴 거다. 내일도 아무도 안 본 버그가 있을 거다. 근데 내일 밤 11시엔 또 일어날 거다. 다시 노트북을 켤 거다. 그리고 내일은 또 3시간 자고 피곤할 거다.뭔가 빠졌나. 무언가 얻었나. 잘 모르겠다.
- 02 Dec, 2025
회의 중 손가락으로 노트북 만지작대며 생각나는 것
회의 중 노트북을 만지작대는 손가락들 출근한다. 9시 정각. 메일 함에 메시지 52개. 슬랙, 읽지 않음: 147개. 회의실로 간다. 오늘 회의는 3개. 점심 먹고도 회의. 그 다음에도 회의. 노트북을 켠다. 화면이 켜진다. 손가락이 움직인다. 회의실의 손가락 누군가 말한다. "Q3 로드맵 검토입니다." 들린다. 안 들린다. 뭐라고 하는 건지는 알겠는데. 손가락이 트랙패드를 만진다. 마우스 커서가 이리저리. 더블클릭, 싱글클릭. 브라우저 탭을 연다. 닫는다. 다시 연다. 실제로는 하는 게 없다. 그냥 손가락이 하고 싶어 한다.회의실의 온도는 21도. 책상은 회색. 의자는 검은색. 내 손은 자꾸만 움직인다. 누군가 나를 본다. '파트장님 어떤 의견 있으세요?' 잠깐. 뭐였지? 손가락을 멈춘다. 입을 연다. "네, 좋은 의견들이 있네요." 그리고 또 손가락. 멈출 수 없는 손가락 이게 언제부터였나. 20년 전에는 이런 거 없었다. 그땐 회의실에 들어가도 손은 한 곳에 있었다. 음... 그건 아니고. 30대 때는 회의도 짧았다. 기술 얘기하고. 의견 나누고. 끝. 요즘은 다르다. 회의는 끝나지 않는다. 끝난다고 해도. 다음 회의가 30초 후에 시작된다. 노트북이 날 따라간다. 프로젝터 보면서도. 손은 자동으로. 누군가가 웃는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스크린샷을 찍고 있었나 보다. 아니다. 그냥 트랙패드를 만지고 있었다. '파트장님, 쉬세요.' 후배가 말한다. 쉬고 있다. 이게 쉬는 거다. 손가락이. 손가락이 하고 싶은 이야기 손가락은 뭔가를 해야 한다. 그게 손가락의 규칙이다. 문서 작성. 코드 작성. 무언가. 회의실에서 40분을 손가락 없이 있을 수는 없다. 그건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서 만진다. 목적 없이. 의미 없이. '마이크로서비스 아키텍처로 전환하면...' 누군가의 목소리. 뒷배경음. 손가락은 메모장을 연다. 아무것도 안 쓴다. 커서만 깜빡인다. 내 뇌는 이미 다른 곳에 있다. 어제 본 버그 리포트. 'NullPointerException 발생'. 어디가 문제인지 봤다. 근데 왜 아직도 생각나지? 손가락이 또 움직인다. 검색창에 'Spring Boot actuator'. 치다가 지운다. 지우고 또 친다. 회의 중엔 멀티태스킹이 답이라는 건가.아니다. 멀티태스킹 아니다. 뭐라고 부르지? 반반채스킹. 회의 반. 다른 거 반. 50% 들으면서. 50% 딴 생각. 근데 손가락은 그걸 안다. 진짜 집중하려고 해도. 손가락이 배신한다. 커피 마신다. 손가락이 또 움직인다. 이번엔 슬랙을 본다. 팀 채널. '배포 완료했습니다.' 좋아. 준수네. 손가락이 엄지손가락을 up emoji로 바꾼다. 아니다. 안 누른다. 회의 중이니까. 노트북을 덮는다. 10초. 다시 킨다. 이건 강박이 아니다. 습관이다. 아니다. 둘 다다. 노트북이 없었던 시간들 2000년. 회의실엔 화이트보드만 있었다. 손가락은? 손가락은 펜을 들었다. 종이에 썼다. 메모를 했다. 회의가 끝나면. 종이에 뭔가 남았다. 지금은? 회의가 끝난다. 노트북을 닫는다. 뭐가 남나? 슬랙에 회의록 하나 뜬다. AI가 요약한 거. 내가 쓴 게 아니다. 손가락은 뭘 했나? 트랙패드를 만졌다. 그뿐이다. 옛날에 나는. 펜과 종이를 쥐고 있었다. 무엇이 나에게서 사라졌나. 손가락이 아니라. 다른 게 사라졌나. 노트북을 닫는다. 정말로. 손가락이 울컥한다. 뭘 해야 하지? 40분의 침묵 오후 2시. 회의실. 누군가 말한다. 나는 못 들었다. 노트북은 닫혀 있었다. 손가락이 할 게 없다. 손가락이 책상 위에 있다. 펼쳐져 있다. 모두가 보인다. 그 손가락이 뭘 할 수 있나. 회의를 듣는다. 아, 첫 번째 손가락 역할. 누군가가 질문한다. 나를 본다. 손가락이 떨린다. 노트북이 없으니까. "네, 맞습니다." 이게 나다.손가락은 지금 뭘 하나. 또 안 한다. 그냥 있다.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 이게 더 힘들다. 3년이 5분 만에 끝났다 2021년. 코로나였다. 원격근무. 회의는 줌이었다. 카메라는 어깨 위. 손가락은 안 보였다. 손가락이 자유로웠다. 코드도 짰다. 기술도 공부했다. 손가락도 했다. 그걸 했다. 남들도 했다. 오피스 복귀. 2024년. 3년이 다 사라졌다. 손가락은 또 노트북을 만진다. 이젠 카메라가 앞이다. 모두가 본다. 손가락이. 손가락과 나 손가락은 좋은 도구다. 코드를 친다. 문서를 쓴다. 메일을 보낸다. 손가락은 나쁜 도구다. 회의 중에 불안을 표현한다. 집중력 부족을 드러낸다. 나를 배신한다. "파트장님 주의 산만한데요?" 아직 아무도 이렇게 안 했다. 근데 저 손가락 때문에. 언젠가는 들을까. 8명 팀. 그 중에 신입이 있다. 저 신입이가 나를 보며 배운다. 손가락이. "회의 중엔 이렇게 하는 거군." 아니다. 그러지 마. 손가락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근데 손가락은 멈추지 않는다. 내 손가락이 내 말을 안 듣는다. 멈추고 싶다 회의실 들어가기 전에 다짐한다. "이번엔 노트북 만지지 말자." 회의실 들어간다. 5분. 손가락이 움직인다. 내가 명령을 한다. '멈춰.' 손가락이 말한다. '싫어.' 이건 내 손가락이 아니라. 내 몸이. 내 뇌가. 회의가 지루하단 뜻이다. 집중 못 한단 뜻이다. 아니면. 그냥 나이다. 20년을 코드로 산 팔뚝. 20년을 키보드로 단련된 손가락. 이젠 안 해도 되니까. 더 하고 싶어 한다. 역설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본다 회의가 끝난다. 누군가가 다가온다. "파트장님, 괜찮으세요?" 뭐가. "조금 피곤해 보였어서." 아. 손가락이 말했나. 내 피곤이 손가락으로 새어나갔나. "괜찮아. 그냥 집중하고 있었어." 거짓말이다. 손가락이 알고 있다. 손가락이 쉬는 시간 밤 11시. 집에 간다. 아내는 이미 잠들었다. 아들은 자기 방에. 딸은 자기 방에. 혼자다. 노트북을 켠다. 손가락이 산다. 코드를 친다. 이때가 다르다. 회의실이 아니니까. 손가락이. 자유롭다. 무의식적으로 만지작대지 않는다. 목표가 있으니까. 버그를 찾는다. 로직을 짠다. 뭔가를 만든다. 손가락이 일한다. 정말로. 3시간. 4시간. 시간이 안 간다. 이때 손가락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손가락이 내 생각을 읽는다. 손가락이 나다. 아침이 온다 다시 7시. 알람. 손가락이 스누즈를 누른다. 5분. 또 누른다. 5분. 또. 출근한다. 메일이 있다. 슬랙이 있다. 회의가 있다. 노트북을 켠다. 손가락이 또 움직인다. 이번엔 회의실에서. 또 손가락이 해줄 수 없는 일들. 손가락은 지친다. 나도 지친다. 그래도 움직인다. 후배의 손가락 옆에 앉은 후배를 본다. 30대 초반. 회의 중에 노트북 없다. 손가락이 책상 위에 있다. 펜을 든다. 아날로그 메모장. 손가락이 움직인다. 의미 있게. 뭔가를 쓴다. 뭔가를 남긴다. 나는. 20년 전에 그랬다. 이제 안 한다. 손가락이 달라졌다. 나도 달라졌다. 내일은 어떨까 회의가 또 있다. 내일도. 모레도. 손가락이 또 노트북을 만질까. 근데 이제 알았다. 손가락이 하는 말. "파트장님, 바빠요." "파트장님, 더 하고 싶어요." "파트장님, 지쳐있어요." 손가락은. 나의 또 다른 목소리다. 손가락이 말한다. 나는 듣지 않는다. 그래도. 듣고 있다.밤 11시, 손가락이 다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