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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으로

회의 중 손가락으로 노트북 만지작대며 생각나는 것

회의 중 손가락으로 노트북 만지작대며 생각나는 것

회의 중 노트북을 만지작대는 손가락들 출근한다. 9시 정각. 메일 함에 메시지 52개. 슬랙, 읽지 않음: 147개. 회의실로 간다. 오늘 회의는 3개. 점심 먹고도 회의. 그 다음에도 회의. 노트북을 켠다. 화면이 켜진다. 손가락이 움직인다. 회의실의 손가락 누군가 말한다. "Q3 로드맵 검토입니다." 들린다. 안 들린다. 뭐라고 하는 건지는 알겠는데. 손가락이 트랙패드를 만진다. 마우스 커서가 이리저리. 더블클릭, 싱글클릭. 브라우저 탭을 연다. 닫는다. 다시 연다. 실제로는 하는 게 없다. 그냥 손가락이 하고 싶어 한다.회의실의 온도는 21도. 책상은 회색. 의자는 검은색. 내 손은 자꾸만 움직인다. 누군가 나를 본다. '파트장님 어떤 의견 있으세요?' 잠깐. 뭐였지? 손가락을 멈춘다. 입을 연다. "네, 좋은 의견들이 있네요." 그리고 또 손가락. 멈출 수 없는 손가락 이게 언제부터였나. 20년 전에는 이런 거 없었다. 그땐 회의실에 들어가도 손은 한 곳에 있었다. 음... 그건 아니고. 30대 때는 회의도 짧았다. 기술 얘기하고. 의견 나누고. 끝. 요즘은 다르다. 회의는 끝나지 않는다. 끝난다고 해도. 다음 회의가 30초 후에 시작된다. 노트북이 날 따라간다. 프로젝터 보면서도. 손은 자동으로. 누군가가 웃는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스크린샷을 찍고 있었나 보다. 아니다. 그냥 트랙패드를 만지고 있었다. '파트장님, 쉬세요.' 후배가 말한다. 쉬고 있다. 이게 쉬는 거다. 손가락이. 손가락이 하고 싶은 이야기 손가락은 뭔가를 해야 한다. 그게 손가락의 규칙이다. 문서 작성. 코드 작성. 무언가. 회의실에서 40분을 손가락 없이 있을 수는 없다. 그건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서 만진다. 목적 없이. 의미 없이. '마이크로서비스 아키텍처로 전환하면...' 누군가의 목소리. 뒷배경음. 손가락은 메모장을 연다. 아무것도 안 쓴다. 커서만 깜빡인다. 내 뇌는 이미 다른 곳에 있다. 어제 본 버그 리포트. 'NullPointerException 발생'. 어디가 문제인지 봤다. 근데 왜 아직도 생각나지? 손가락이 또 움직인다. 검색창에 'Spring Boot actuator'. 치다가 지운다. 지우고 또 친다. 회의 중엔 멀티태스킹이 답이라는 건가.아니다. 멀티태스킹 아니다. 뭐라고 부르지? 반반채스킹. 회의 반. 다른 거 반. 50% 들으면서. 50% 딴 생각. 근데 손가락은 그걸 안다. 진짜 집중하려고 해도. 손가락이 배신한다. 커피 마신다. 손가락이 또 움직인다. 이번엔 슬랙을 본다. 팀 채널. '배포 완료했습니다.' 좋아. 준수네. 손가락이 엄지손가락을 up emoji로 바꾼다. 아니다. 안 누른다. 회의 중이니까. 노트북을 덮는다. 10초. 다시 킨다. 이건 강박이 아니다. 습관이다. 아니다. 둘 다다. 노트북이 없었던 시간들 2000년. 회의실엔 화이트보드만 있었다. 손가락은? 손가락은 펜을 들었다. 종이에 썼다. 메모를 했다. 회의가 끝나면. 종이에 뭔가 남았다. 지금은? 회의가 끝난다. 노트북을 닫는다. 뭐가 남나? 슬랙에 회의록 하나 뜬다. AI가 요약한 거. 내가 쓴 게 아니다. 손가락은 뭘 했나? 트랙패드를 만졌다. 그뿐이다. 옛날에 나는. 펜과 종이를 쥐고 있었다. 무엇이 나에게서 사라졌나. 손가락이 아니라. 다른 게 사라졌나. 노트북을 닫는다. 정말로. 손가락이 울컥한다. 뭘 해야 하지? 40분의 침묵 오후 2시. 회의실. 누군가 말한다. 나는 못 들었다. 노트북은 닫혀 있었다. 손가락이 할 게 없다. 손가락이 책상 위에 있다. 펼쳐져 있다. 모두가 보인다. 그 손가락이 뭘 할 수 있나. 회의를 듣는다. 아, 첫 번째 손가락 역할. 누군가가 질문한다. 나를 본다. 손가락이 떨린다. 노트북이 없으니까. "네, 맞습니다." 이게 나다.손가락은 지금 뭘 하나. 또 안 한다. 그냥 있다.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 이게 더 힘들다. 3년이 5분 만에 끝났다 2021년. 코로나였다. 원격근무. 회의는 줌이었다. 카메라는 어깨 위. 손가락은 안 보였다. 손가락이 자유로웠다. 코드도 짰다. 기술도 공부했다. 손가락도 했다. 그걸 했다. 남들도 했다. 오피스 복귀. 2024년. 3년이 다 사라졌다. 손가락은 또 노트북을 만진다. 이젠 카메라가 앞이다. 모두가 본다. 손가락이. 손가락과 나 손가락은 좋은 도구다. 코드를 친다. 문서를 쓴다. 메일을 보낸다. 손가락은 나쁜 도구다. 회의 중에 불안을 표현한다. 집중력 부족을 드러낸다. 나를 배신한다. "파트장님 주의 산만한데요?" 아직 아무도 이렇게 안 했다. 근데 저 손가락 때문에. 언젠가는 들을까. 8명 팀. 그 중에 신입이 있다. 저 신입이가 나를 보며 배운다. 손가락이. "회의 중엔 이렇게 하는 거군." 아니다. 그러지 마. 손가락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근데 손가락은 멈추지 않는다. 내 손가락이 내 말을 안 듣는다. 멈추고 싶다 회의실 들어가기 전에 다짐한다. "이번엔 노트북 만지지 말자." 회의실 들어간다. 5분. 손가락이 움직인다. 내가 명령을 한다. '멈춰.' 손가락이 말한다. '싫어.' 이건 내 손가락이 아니라. 내 몸이. 내 뇌가. 회의가 지루하단 뜻이다. 집중 못 한단 뜻이다. 아니면. 그냥 나이다. 20년을 코드로 산 팔뚝. 20년을 키보드로 단련된 손가락. 이젠 안 해도 되니까. 더 하고 싶어 한다. 역설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본다 회의가 끝난다. 누군가가 다가온다. "파트장님, 괜찮으세요?" 뭐가. "조금 피곤해 보였어서." 아. 손가락이 말했나. 내 피곤이 손가락으로 새어나갔나. "괜찮아. 그냥 집중하고 있었어." 거짓말이다. 손가락이 알고 있다. 손가락이 쉬는 시간 밤 11시. 집에 간다. 아내는 이미 잠들었다. 아들은 자기 방에. 딸은 자기 방에. 혼자다. 노트북을 켠다. 손가락이 산다. 코드를 친다. 이때가 다르다. 회의실이 아니니까. 손가락이. 자유롭다. 무의식적으로 만지작대지 않는다. 목표가 있으니까. 버그를 찾는다. 로직을 짠다. 뭔가를 만든다. 손가락이 일한다. 정말로. 3시간. 4시간. 시간이 안 간다. 이때 손가락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손가락이 내 생각을 읽는다. 손가락이 나다. 아침이 온다 다시 7시. 알람. 손가락이 스누즈를 누른다. 5분. 또 누른다. 5분. 또. 출근한다. 메일이 있다. 슬랙이 있다. 회의가 있다. 노트북을 켠다. 손가락이 또 움직인다. 이번엔 회의실에서. 또 손가락이 해줄 수 없는 일들. 손가락은 지친다. 나도 지친다. 그래도 움직인다. 후배의 손가락 옆에 앉은 후배를 본다. 30대 초반. 회의 중에 노트북 없다. 손가락이 책상 위에 있다. 펜을 든다. 아날로그 메모장. 손가락이 움직인다. 의미 있게. 뭔가를 쓴다. 뭔가를 남긴다. 나는. 20년 전에 그랬다. 이제 안 한다. 손가락이 달라졌다. 나도 달라졌다. 내일은 어떨까 회의가 또 있다. 내일도. 모레도. 손가락이 또 노트북을 만질까. 근데 이제 알았다. 손가락이 하는 말. "파트장님, 바빠요." "파트장님, 더 하고 싶어요." "파트장님, 지쳐있어요." 손가락은. 나의 또 다른 목소리다. 손가락이 말한다. 나는 듣지 않는다. 그래도. 듣고 있다.밤 11시, 손가락이 다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