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회의, 점심 회의, 저녁 회의 - 코딩할 시간은?
- 12 Dec, 2025
오늘의 캘린더

아침 9시. 캘린더를 켰다.
빨간색 블록 3개. 파란색 블록 4개. 노란색 블록 2개.
“오늘도 회의 9개네.”
커피를 마신다. 첫 잔.
9시 30분, 주간회의. 10시 30분, 기획팀 미팅. 11시, 임원 보고. 점심 먹고 1시, 협력사 미팅. 2시, 기술검토 회의. 3시, 1on1. 4시, 전사 타운홀. 5시, 긴급 이슈 회의.
“코딩은 언제 해?”
6시 이후만 비어있다. 그것도 ‘긴급 회의 없으면’.
파트장 된 지 1년. 이게 맞나 싶다.
회의의 종류

회의는 크게 3종류다.
첫째, 내가 있어야 하는 회의.
기술 검토, 아키텍처 결정, 코드리뷰. 이런 건 파트장이 빠지면 안 된다. 전체 회의의 30% 정도.
둘째, 내가 없어도 되는 회의.
정보 공유, 진행상황 보고, 일정 조율. 이메일이나 슬랙으로 되는데 왜 모이나. 40% 정도.
셋째, 뭐하는 건지 모르겠는 회의.
시작할 때는 A 얘기, 끝날 때는 Z 얘기. 결론 없음. 다음 회의 약속만 생김. 나머지 30%.
오늘 오전 회의 3개 끝났다.
첫째 유형 1개, 둘째 유형 1개, 셋째 유형 1개.
코딩한 시간: 0분.
작성한 코드 줄 수: 0줄.
마신 커피: 3잔.
점심시간의 함정
점심 먹고 돌아왔다. 12시 50분.
“1시 회의까지 10분 남았네.”
IDE를 켠다. 어제 하던 코드 열었다.
public class UserService {
// TODO: 리팩토링 필요
TODO 주석을 본다. 언제 달았더라. 지난주?
손가락을 올린다. 키보드 위에.
슬랙 알림.
“박 파트장님, 1시 회의 5분 전인데 자료 미리 보시면…”
자료를 연다. PDF 37페이지.
1시 회의 시작.
“오늘은 30분이면 끝날 것 같습니다.”
2시에 끝났다.
다음 회의까지 1시간. 이제 코딩 가능.
IDE를 켠다. 다시.
public class UserService {
// TODO: 리팩토링 필요
손가락을 올린다.
“박 파트장님, 잠깐 여쭤볼 게 있는데요…”
후배가 온다. 책상으로.
“이 부분 어떻게 구현하면 좋을까요?”
설명한다. 20분.
시계를 본다. 2시 30분.
다음 회의까지 30분.
“30분이면 뭘 하나.”
메일을 확인한다. 47개.
3시 회의 시작.
저녁이 되면

6시 15분. 마지막 회의 끝.
사무실이 조용하다. 후배들은 다 퇴근했다.
“이제 코딩 시작이네.”
IDE를 켠다. 세 번째.
public class UserService {
// TODO: 리팩토링 필요
손가락이 움직인다.
30분 지났다. 코드 50줄 짰다.
1시간 지났다. 테스트 코드 작성 중.
1시간 30분 지났다. 리팩토링 완료.
“이 맛이지.”
시계를 본다. 8시.
배가 고프다. 점심 이후 아무것도 안 먹었다.
피곤하다. 회의 9개 했다.
집에 가야 한다. 아들이 기다린다.
하지만 지금 집중된다. 이 흐름을 끊고 싶지 않다.
30분만 더. 이 기능만 끝내면.
9시에 퇴근했다.
오늘 작성한 코드: 150줄.
오늘 참석한 회의: 9개.
오늘 코딩한 시간: 3시간.
“뭔가 이상한데.”
20년 전과 지금
20년 전, 신입 때.
출근하면 코딩. 점심 먹고 코딩. 저녁 먹고 코딩.
회의는 주 1회. 그것도 30분.
하루 코딩 시간: 8시간 이상.
코드 리뷰는 옆자리 선배한테 바로. 5분이면 끝.
이슈 생기면 팀원들 모아서 화이트보드 앞에서 토론. 30분 안에 결정.
빠르고 단순했다.
지금은 뭐든 ‘회의’다.
코드 리뷰 회의. 30분.
기술 검토 회의. 1시간.
이슈 대응 회의. 1시간 30분.
“회의 준비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계산해봤다.
회의 9개 × 평균 50분 = 450분 = 7시간 30분.
회의 자료 준비, 사전 검토, 사후 정리까지 합치면 9시간.
근무시간 9시간.
“아, 그래서 코딩을 못 하는 거구나.”
파트장의 역설
후배가 물었다. 지난주에.
“파트장님은 요즘 코딩 많이 하세요?”
“응… 저녁에 좀 하지.”
“부럽다. 저는 하루 종일 코딩만 해요.”
”…”
부러운 건 나다.
파트장 달기 전에는 나도 하루 종일 코딩했다.
지금은 하루 종일 회의한다.
아이러니다.
개발 경력 쌓아서 파트장 됐는데, 정작 개발은 못 한다.
기술 실력 인정받아서 올라왔는데, 정작 기술은 녹슨다.
“이게 승진인가, 퇴보인가.”
동기한테 말했다. 전화로.
“그게 관리자야.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시키는 거지.”
“난 시키고 싶어서 개발자 된 게 아닌데.”
“그럼 임원 승진 포기해.”
”…”
딜레마다.
임원 되면 연봉 오른다. 1억 넘는다.
하지만 개발은 진짜 못 한다. 회의만 더 늘어난다.
평 개발자로 남으면 코딩 할 수 있다.
하지만 45살 평 개발자. 이게 맞나 싶기도 하다.
회의 중독 사회
우리 회사만 그런 게 아니다.
지인들 만나면 다들 비슷하다.
대기업은 더 심하다. 회의의 회의, 보고의 보고.
스타트업도 요즘 그렇다. ‘애자일’이라면서 매일 스탠드업, 스프린트 리뷰, 레트로스펙티브.
“회의가 업무가 된 거다.”
실제 일은 회의 시간 외에.
개발은 저녁에. 기획은 야근 시간에. 디자인은 주말에.
정규 근무시간은 회의로 가득 차고, 실제 업무는 그 외 시간에 하는 시스템.
“이게 정상인가?”
누가 봐도 비정상이다.
하지만 아무도 바꾸지 못한다.
왜냐면 모두가 회의를 만들기 때문이다.
나도 만든다. 이번 주에 회의 2개 잡았다.
“필요해서 잡았는데…”
정말 필요한가?
솔직히 슬랙으로 물어보면 될 것도 있다.
하지만 ‘확실하게 정하려면’ 회의를 한다.
그렇게 회의가 늘어난다.
악순환이다.
6시 이후의 개발자
요즘 깨달았다.
나는 ‘낮의 개발자’와 ‘밤의 개발자’가 다르다.
낮의 나: 회의 참석자, 의견 제시자, 조율자, 관리자.
밤의 나: 프로그래머.
낮에는 말을 한다. 많이.
밤에는 코드를 짠다. 조용히.
낮에는 에너지가 빠져나간다.
밤에는 에너지가 생긴다.
“본업은 밤에 하는 거네.”
이상하다.
개발자인데 개발은 부업 시간에 한다.
본업 시간에는 회의를 한다.
“이러다 진짜 개발 못 하는 관리자 되겠다.”
두렵다.
10년 후, 55살.
임원 달고 회의만 하는 ‘전직 개발자’.
코드는 읽을 수 있지만 짤 수는 없는 사람.
기술은 아는데 적용은 못 하는 사람.
“그건 되고 싶지 않은데.”
작은 저항
이번 주부터 실험 중이다.
‘코딩 타임’ 블록을 캘린더에 넣었다.
매일 오후 4시~6시. 2시간.
빨간색으로 표시. 제목은 “Focus Time - 회의 불가”.
첫날, 누가 4시 30분에 회의 잡으려고 했다.
“죄송한데 그 시간은 어려워서요.”
“아, 네. 그럼 6시 이후로 할까요?”
“6시 이후도 어렵습니다. 내일 오전은 어떠세요?”
회의가 미뤄졌다.
신기했다.
거절할 수 있구나.
둘째 날, 4시에 슬랙이 왔다.
“파트장님, 급한 건데 잠깐 통화 가능하세요?”
10초 고민했다. 답장했다.
“6시 이후 통화 드릴게요. 급하면 메시지로 먼저 남겨주세요.”
메시지로 왔다. 읽어보니 그렇게 급한 건 아니었다.
6시에 전화했다. 5분 만에 해결.
“2시간 회의할 뻔했네.”
셋째 날, 4시부터 6시까지 코딩했다.
방해 없이.
집중해서.
200줄 짰다.
“이 맛이었지.”
불편한 진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코딩 타임’을 지키려면 다른 걸 포기해야 한다.
저녁 약속은 늘어난다. 4시 회의가 6시로 밀리니까.
급한 이슈는 대응이 늦어진다. 2시간 후에야 보니까.
팀원들은 답답해한다. 바로 물어볼 수 없으니까.
“이기적인 건가?”
고민된다.
파트장이 2시간씩 연락 안 되면, 팀 운영에 문제 생긴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나는 개발을 못 한다.
어디까지가 파트장의 책임이고, 어디까지가 개인의 권리인가.
정답은 모르겠다.
그냥 해보는 거다. 실험.
망하면 방법을 바꾸면 된다.
숫자로 보는 현실
지난달 통계를 냈다. 실제로.
총 근무 시간: 220시간 (주 55시간 × 4주)
회의 시간: 143시간 (65%)
코딩 시간: 48시간 (22%)
이메일/슬랙: 22시간 (10%)
기타: 7시간 (3%)
“회의가 3분의 2네.”
신입 때 통계도 찾아봤다. 20년 전 기록.
총 근무 시간: 240시간 (야근 많았음)
회의 시간: 8시간 (3%)
코딩 시간: 210시간 (88%)
기타: 22시간 (9%)
“코딩이 거의 9할이었네.”
20년 만에 완전히 뒤집혔다.
코딩 88% → 22%
회의 3% → 65%
“이게 성장인가, 변질인가.”
동료들의 선택
팀장급 동료들과 술 먹었다. 지난주.
A형: “나는 포기했어. 코딩은 후배들이 잘해. 난 방향만 잡아주면 돼.”
B형: “새벽에 해. 5시에 일어나서 7시까지 집에서 코딩.”
C형: “휴가 쓰고 코딩해. 일년에 휴가 10일은 코딩용.”
D형: “이직했어. 작은 회사로. 회의 적은 데로.”
다들 나름의 해답을 찾았다.
나는 어떤 타입일까.
A형은 되기 싫다. 아직.
B형은 체력이 안 된다. 새벽 5시는 무리.
C형은… 가족한테 미안하다.
D형은 용기가 안 난다. 45살 이직.
“5번째 타입을 만들어야 하나.”
후배에게 들은 말
1on1 하다가 들었다. 29살 후배.
“파트장님은 코딩 안 하셔도 되는 거 아니에요?”
”…왜?”
“관리하시잖아요. 방향 정하시고, 리뷰하시고.”
“나도 코딩하고 싶은데.”
“그럼 파트장 안 하시면 되죠.”
”…”
틀린 말은 아니다.
파트장 달면 회의가 많은 거 알고 올라왔다.
코딩 시간 줄어드는 거 알고 승진했다.
“내가 선택한 거잖아.”
하지만 이렇게까지 줄어들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그리울 줄도 몰랐다.
코딩이.
이번주 목표
캘린더를 본다. 이번 주.
빨간색 블록 15개. 회의.
파란색 블록 5개. 새로 만든 ‘코딩 타임’.
“5일 × 2시간 = 10시간.”
10시간이면 뭘 할 수 있나.
리팩토링 하나 끝낼 수 있다.
새 기능 하나 만들 수 있다.
기술 부채 하나 갚을 수 있다.
“해보자.”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10시간이 5시간이 돼도 괜찮다.
지금보다 나으면 된다.
회의는 줄이지 못해도, 코딩은 늘릴 수 있다.
관리자가 돼도, 개발자는 유지할 수 있다.
“아직은.”
회의 9개 하고 코드 150줄. 이게 정상은 아닐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