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va와 Spring의 20년, 이게 족쇄인가 무기인가

Java와 Spring의 20년, 이게 족쇄인가 무기인가

Java와 Spring의 20년, 이게 족쇄인가 무기인가 아침 스탠드업 미팅 "파트장님, 이번 프로젝트는 Kotlin으로 해도 될까요?" 신입 김대리가 물었다. 25살. 눈이 반짝였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3초 정도 침묵했다. "일단 기존 시스템이 Java라서..." 변명처럼 들렸다. 나한테도. 회의실을 나왔다. 복도를 걷는데 발걸음이 무거웠다.20년이다. Java 1.4부터 썼다. 당시엔 최신이었다. EJB가 복잡해서 Spring 나왔을 때 신세계였다. 지금 그 Spring이 "레거시 기술"로 불린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아니, 믿고 싶지 않다. 점심시간, 구내식당 후배 세 명이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한 칸 떨어진 곳에 앉았다. "요즘 Rust 공부하는데 재밌어요." "저는 Next.js 강의 듣는 중이에요." "TypeScript 5.0 나왔는데 개쩔어요." 들리는 단어가 하나도 안 반갑다. 나는 제육볶음을 먹었다. 입맛이 없었다. 핸드폰을 켰다. 개발 커뮤니티를 봤다. "Java는 이제 끝났다" "Spring은 너무 무겁다" "요즘 누가 XML 설정을 하냐" 댓글이 200개였다. 다 읽었다. 밥이 목에 안 넘어갔다. 오후 3시, 코드리뷰 김대리가 PR을 올렸다. Kotlin으로 작성한 유틸리티 클래스였다. data class UserRequest( val name: String, val email: String )5줄이었다. 내가 Java로 짰으면 20줄이다. Getter, Setter, Constructor, toString, equals, hashCode. "깔끔하네요." 내가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런데 왜 기분이 이상하지? 김대리가 웃었다. "Kotlin 편하죠?" "응, 좋아 보여." 말은 그렇게 했다. 속으로는 달랐다. '나도 배워야 하나? 지금?'그날 저녁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Kotlin 입문' 강의를 결제했다. 19,900원이었다. 일주일 뒤 진도는 15%였다. 그것도 출퇴근 시간에만 봤다. 회사에서 Java 코드를 하루 8시간 짜는데, 퇴근 후에 Kotlin을 배울 기력이 없었다. 밤 11시, 혼자 남은 사무실 다들 퇴근했다. 나만 남았다. 레거시 시스템 리팩토링 작업이었다. 10년 된 코드를 고치는 중이었다. 이상했다. 10년 전 코드가 내 코드였다. 주석을 읽었다. "// 2014.03.15 박시니어 작성" 당시엔 최선이었다. 지금 보니 개선할 게 보인다. 20분 만에 300줄을 100줄로 줄였다. Spring의 최신 기능을 썼다. 빌드했다. 테스트 통과. 배포 완료. 이 순간만큼은 기분이 좋았다. '나 아직 되네.' 그런데 문득 생각했다. '10년 뒤 이 코드도 레거시겠지?' 창밖을 봤다. 빌딩 불빛이 깜빡였다. 주말 오전, 카페 노트북을 펼쳤다. 기술 블로그를 읽었다. "Why We Migrated from Java to Kotlin" "Spring Boot vs Micronaut: Performance Comparison" "Is Java Still Relevant in 2024?" 제목만 봐도 불안했다. 클릭했다. 읽었다. 이해했다. 공감도 했다. 그런데 실천은 못 하겠더라. 월요일 출근하면 또 Java다. 또 Spring이다. 레거시 시스템 10개. 전부 Java 8. 하나는 아직 Java 7이다.마이그레이션? 팀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일단 돌아가잖아요. 급한 거 먼저 하죠." 급한 건 언제나 있다. 신규 프로젝트, 장애 대응, 성능 개선. 레거시는 언제나 '나중에'. 그 '나중에'는 안 온다. 20년 경험으로 안다. 월요일 아침, 1on1 미팅 신입 이사원이 물었다. "파트장님, 저 Java 말고 다른 것도 배워야 할까요?" 22살이었다. 입사 3개월. 나는 대답을 못 했다. 5초 정도. "음... 일단 Java를 깊게 배워." "그런데 요즘 추세는..." "추세 따라가려고 하면 끝이 없어." 말하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이사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애매했다. 복잡했다. 내가 후배 커리어를 막는 건가?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Java 모르고 어떻게 개발을 하나? JVM 구조, GC 동작 원리, 멀티스레딩, 동시성 제어. 이런 거 모르고 Kotlin만 쓰면 그게 진짜 실력인가? 혼란스러웠다. 목요일 저녁, 기술 세미나 사내 세미나였다. 주제는 "Kotlin 도입 사례". 발표자는 타 부서 파트장이었다. 나랑 동갑. "마이그레이션 결과, 코드량 30% 감소, 빌드 시간 20% 단축." 박수가 나왔다. 질문 시간이었다. 손을 들었다. "기존 Java 개발자들 적응은 어땠나요?" 파트장이 웃었다. "처음엔 힘들었죠. 근데 2주면 익숙해집니다." 2주. 나는 한 달째 15% 진도다. 세미나가 끝났다. 복도에서 그 파트장을 만났다. "형, 진짜 2주면 돼요?" "솔직히 말하면 3개월은 걸려요. 근데 발표 자리에서 그렇게 말하면..." 웃었다. 둘이. 조금 위안이 됐다. 금요일 오후, 연봉 협상 팀장님이 불렀다. 연봉 리뷰 시즌이었다. "올해 평가 A입니다. 7% 인상." 9500만원에서 10165만원이 됐다. "감사합니다." "내년엔 임원 후보 검토 들어갑니다." 임원. 개발자의 꿈이라고 하던데 나는 아니다. 임원 되면 관리만 한다. 코드는 진짜 못 짠다. "고민해보겠습니다." 팀장님이 의아한 표정이었다. "고민할 게 뭐가 있어요?" 설명할 수 없었다. '저는 코딩이 좋아서요' 라고 하면 유치해 보인다. 45살이 무슨 코딩이냐는 표정을 볼 게 뻔했다. 그냥 웃었다. 토요일 오전, 개인 프로젝트 집에서 혼자 코딩했다. 토이 프로젝트였다. 간단한 블로그 시스템. 그런데 이번엔 Kotlin으로 시작했다. IDE를 켰다. IntelliJ가 Kotlin을 추천했다. 첫 줄을 썼다. fun main() { println("Hello, Kotlin") }신기했다. Java보다 타이핑이 적었다. 3시간 코딩했다. REST API 3개 만들었다. Java였으면 5시간 걸렸을 거다. '어? 생각보다 괜찮은데?' 저녁을 먹고 다시 앉았다. 자정까지 코딩했다. 오랜만에 재밌었다. 월요일 출근길에 문득 깨달았다. '회사 코드는 왜 이렇게 안 하지?' 답은 간단했다. 레거시. 100만 줄. 10년. 고객. 안정성. 한숨이 나왔다. 월요일 점심, 대학 동기와의 전화 동기가 전화했다. 대학 때 같이 C 언어 과제 했던 친구. "야, 나 이번에 스타트업 CTO 됐어." "오, 축하해." "근데 기술 스택 고민인데, Java 쓸까 Kotlin 쓸까?" 나는 3초 멈췄다. "...둘 다 장단점이 있지." "야, 너 Java 20년 했잖아. 솔직히 말해봐." 솔직히. "Java는 안정적이야. 레퍼런스 많고, 사람 구하기 쉽고." "근데?" "근데 요즘 애들은 Kotlin 배우고 싶어 해. 코드도 깔끔하고." "그럼 뭐 하라는 거야?" "...모르겠어. 나도 고민 중이야." 친구가 웃었다. "너도 그런 고민 하는구나. 위안된다." 전화를 끊었다. 위안은 안 됐다. 화요일 저녁, 후배와의 맥주 신입 김대리가 술을 제안했다. 둘이 나갔다. 두 잔 마시고 김대리가 물었다. "파트장님, 진짜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Java 20년 하셨잖아요. 후회 안 해요?" 직구였다. 나는 맥주를 마셨다. 생각했다. "후회... 는 아닌데, 불안하긴 해." "뭐가요?" "내가 시대에 뒤처지는 건 아닌가. 10년 뒤에도 Java 할 건가." 김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래요. 지금 Java 배우는데, 이게 맞나 싶어요." "그래서 Kotlin 하고 싶은 거고?" "네. 근데 파트장님이 Java가 더 중요하다고 하셔서..." 미안했다. 내 불안을 후배한테 떠넘긴 것 같았다. "이렇게 하자. 회사에선 Java 하고, 개인 시간엔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그럼 파트장님은요?" "나도... 그렇게 하려고." 둘이 웃었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수요일 오전, 기술 부채 회의 분기별 기술 부채 리뷰였다. 리스트를 펼쳤다.Java 7 → 8 마이그레이션 (3년째 미뤄짐) Spring 4 → 5 업그레이드 (2년째 미뤄짐) XML 설정 → Java Config 전환 (4년째 미뤄짐)팀장님이 말했다. "우선순위를 정합시다." 다들 침묵했다. 나는 손을 들었다. "다 중요한데, 리소스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죠?" "...모르겠습니다." 회의가 끝났다. 결론은 '다음 분기에 재논의'. 복도를 걷는데 막막했다. 이게 Java의 문제인가, 회사의 문제인가, 내 문제인가. 모르겠다. 목요일 새벽, 잠 못 이루고 새벽 3시에 깼다. 다시 못 잤다.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Java 20년. 이게 족쇄인가, 무기인가. 족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새로운 걸 못 배우게 막는 것 같다. 그런데 또 무기이기도 하다. 문제 생기면 나는 안다. 20년 경험으로. 후배들이 3일 걸릴 버그를 나는 30분에 찾는다. 이게 실력 아닌가? 아니다. 이건 경험이다. 실력은 새로운 걸 배우는 능력이다. 그럼 나는 실력이 없는 건가? 아침이 왔다. 4시간 잤다. 금요일 오후, 깨달음 같은 것 퇴근 30분 전이었다. 코드를 짜고 있었다. Java로 복잡한 동시성 로직을 구현했다. ExecutorService, CountDownLatch, AtomicInteger. 40분 걸렸다. 옆자리 김대리가 봤다. "와... 이런 거 어떻게 아세요?" "20년 하다 보니까." "저는 언제쯤..." "너도 10년 하면 알아." 그 순간 깨달았다. Kotlin이든 Rust든 Go든, 10년 하면 전문가가 된다. 나는 Java 전문가다. 이게 족쇄가 아니라 정체성이다. 문제는 Java가 아니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게 겁났던 거다. 초보가 되는 게 싫었던 거다. 45살에 '모른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웠던 거다. 주말, 결심 토요일 아침. 다시 Kotlin 프로젝트를 열었다. 이번엔 마음가짐이 달랐다. 'Java를 버리는 게 아니라 확장하는 거다.' 20년 Java 경험이 Kotlin 배울 때 도움이 된다. JVM은 같으니까. 오히려 신입보다 유리하다. 기초가 탄탄하니까. 8시간 코딩했다. 점심도 안 먹었다. 저녁에 아내가 물었다. "요즘 왜 이래?" "공부 중이야." "무슨?" "새로운 거." 아내가 웃었다. "그래, 그렇게 사는 게 너답지." 일요일에는 블로그 글을 썼다. 제목: "45살 개발자의 Kotlin 입문기" 조회수 3개 나왔다. 다 내가 새로고침한 거다. 상관없다. 나를 위한 기록이다. 월요일, 새로운 시작 출근했다. 스탠드업 미팅이었다. 김대리가 물었다. "파트장님, Kotlin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응." "그럼 다음 프로젝트 Kotlin으로 해도 될까요?" 예전 같았으면 망설였을 거다. 이번엔 바로 대답했다. "해보자. 나도 같이 배울게." 김대리 눈이 커졌다. "진짜요?" "응. 너가 가르쳐줘."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후배가 선배를 가르친다는 게 어색했나 보다. 나는 웃었다. "이상해? 나도 배워야지. 20년 했다고 다 아는 거 아니야." 분위기가 풀렸다. 김대리가 말했다. "파트장님, 멋있으시다." 멋있다기보단 무서웠다. 근데 더 무서운 건 안 배우는 거다.Java 20년은 족쇄가 아니다. 토대다. 그 위에 새로운 걸 쌓으면 된다. 늦은 게 아니라 깊은 거다. 오늘도 배운다.

대학 동기 모임, 임원 둘에 창업가 하나 (나는?)

대학 동기 모임, 임원 둘에 창업가 하나 (나는?)

20년 만의 모임토요일 저녁 7시. 강남역 근처 삼겹살집. 동기 모임이다. 대학 졸업하고 20년. 문 열고 들어가니 셋이 먼저 와 있다. "야, 박시니어!" 민호다. 임원 달았다는. "오랜만이다." 악수했다. 손에 힘이 있다. 옆에 앉은 게 준석. 얘도 임원. "형님, 요즘 어때?" 형님이라니. 대학 땐 그냥 이름 불렀는데. "그냥 그렇지 뭐." 마지막이 성우. 창업했다는 애. "박시니어, 너 아직도 코딩해?" "응." "대단하다. 나는 손 뗀 지 5년 됐어." 소주 두 병 시켰다. 삼겹살 구워진다. 임원 A와 임원 B민호가 명함 꺼냈다. "이거 새로 만들었어." 전무이사. 대기업 계열사. "와, 전무네." "올해 달았어. 겨우." 겨우라니. 45살에 전무면 빠른 거다. 준석도 명함 내밀었다. "나도 올해." 상무. 역시 대기업. "연봉은?" 민호가 웃는다. "2억 좀 넘어. 스톡옵션 포함이면 3억?" 준석이 고개 끄덕인다. "나도 비슷해. 근데 세금 떼면..." 둘이 웃는다. 연봉 얘기를 농담처럼. 나는 소주 한 잔 마셨다. 9500만원. 내 연봉. 절반도 안 된다. "박시니어 너는?" "비슷해." 거짓말이다. 전혀 안 비슷하다. "아직도 코딩해? 관리는 안 해?" "파트장이야. 8명 관리." "오, 그래도 코딩?" "응. 저녁에." 민호가 고개를 젓는다. "나는 코드 본 지 3년 됐어. 볼 시간이 없어." 준석도 맞장구. "나도. 하루 종일 회의." 성우가 끼어든다. "나도 마찬가지. 창업하면 코딩 못 해." 셋이 웃는다. 나만 웃지 않았다. 창업가의 이야기 성우 얘기가 시작됐다. "작년 매출 50억." "대박." "올해는 100억 목표." "직원은?" "30명. 개발자가 20명." 민호가 감탄한다. "잘됐네. IPO는?" "내년쯤 준비하려고." 준석이 묻는다. "지분은 얼마 들고 있어?" "40%. 공동창업자랑 반반." 계산해봤다. 기업가치 500억이면 200억. 성우 혼자 200억이다. "힘들지 않아?" 내가 물었다. "힘들지. 개발자 뽑기도 어렵고." "연봉 얼마 줘?" "시니어급은 1억 넘게. 안 주면 안 와." 1억. 내가 받는 돈보다 많다. 내가 20년 개발한 값보다 신입 시니어가 비싸다. "박시니어, 너 올래? 우리 회사." 농담이다. 진담 같기도 하다. "생각해볼게." 역시 농담으로 받았다. 성우가 웃는다. "CTO 자리 비어 있어. 1억 5천." 1억 5천만원. 내 연봉의 1.5배다. "근데 야근 많아. 주말도 일해." "그럼 됐어." 진담이다. 나는 뭔가화장실 갔다. 거울 봤다. 45살. 주름 생겼다. 흰머리 보인다. 파트장. 20년차. 9500만원. 민호는 전무. 2억. 준석은 상무. 2억. 성우는 대표. 200억. 나는? 개발자. 코딩하는 개발자. 손 씻으면서 생각했다. 뭔가 잘못된 건가. 20년 전 같은 학교 다녔다. 같은 교수 밑에서 배웠다. 같은 알고리즘 문제 풀었다. 20년 후 차이가 이렇게 크다. 내가 게으른 건가. 아니다. 나도 열심히 했다. 밤새 코딩했다. 주말도 일했다. 20년 동안 한 번도 안 쉬었다. 그런데 왜. 화장실 나왔다. 셋이 웃고 있다. "박시니어, 괜찮아?" "응." 앉았다. 고기 구웠다. 코딩이 좋은 이유 민호가 물었다. "너 임원 안 달아?" "모르겠어." "승진하면 개발 못 하잖아." "그게 문제지." 준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그랬어. 근데 어쩔 수 없어." "왜?" "먹고살아야지." 성우가 끼어든다. "박시니어는 개발 진짜 좋아하나 봐." "응." "부럽다. 나는 이제 싫어." "왜?" "손 떼니까 재미가 없어. 근데 돌아갈 수도 없고." 민호도 동의한다. "맞아. 나도 가끔 코드 보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 준석이 웃는다. "우리 다 똑같네." 셋이 웃는다. 나도 웃었다. 진짜 웃음이다. 돈은 적게 번다. 임원도 아니다. 창업도 안 했다. 근데 나는 코딩한다. 저녁 6시 넘어서. 팀원들 퇴근하고. 혼자 IDE 켜고 코드 짠다. 새로운 기능 만든다. 버그 고친다. 리팩토링한다. 테스트 짠다. 그게 좋다. 코드가 돌아가는 게 좋다. 문제가 해결되는 게 좋다. 20년 해도 안 질린다. 이게 내 답이다. 집 가는 길 모임 끝났다. 11시. 택시 잡았다. 민호가 먼저 탔다. "박시니어, 나중에 또 보자." "그래." 준석이 손 흔든다. "다음엔 내가 살게." "알았어." 성우가 악수했다. "진짜 올 생각 있으면 연락해." "그럴게." 거짓말이다. 안 갈 거다. 지하철 탔다. 2호선. 창밖 봤다. 강남 빌딩들 반짝인다. 저 안에서 민호가 일한다. 준석도 일한다. 성우 회사도 저 어디쯤 있다. 나는 판교에서 일한다. IT 자회사. 9층 건물. 내 자리는 7층 구석. 듀얼 모니터. 기계식 키보드. IntelliJ 켜놓고 코드 짠다. 그게 내 자리다. 20년 동안 지킨 자리. 돈과 코드 집 도착했다. 12시. 아내가 자고 있다. 아이들도. 침대에 누웠다. 오늘 생각했다. 돈. 민호 2억. 준석 2억. 성우 200억. 나 9500만원. 차이가 크다. 부럽다. 솔직히. 2억 받으면 뭐 할까. 집 바꾼다. 차 바꾼다. 아이들 학원 더 보낸다. 근데 그게 다인가. 코드는? 코드는 못 짠다. 민호 말대로 시간이 없다. 준석 말대로 어쩔 수 없다. 성우 말대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럼 난? 돈은 적게 번다. 근데 코드는 짠다. 매일 짠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키보드 두드린다. 화면에 글자 찍힌다. 빌드 돌린다. 테스트 돈다. 성공한다. 그게 좋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거. 내일도 내일 월요일이다. 출근한다. 메일 50개 읽는다. 회의 3개 한다. 점심 먹고 1on1 한다. 코드리뷰 한다. 저녁 6시 넘어서 코드 짠다. 민호처럼 2억은 못 번다. 준석처럼 상무는 아니다. 성우처럼 200억은 없다. 근데 괜찮다. 나는 코드 짠다. 45살. 20년차. 아직도 현역이다. 키보드 두드리는 개발자다. 그게 내 정체성이다. 돈 많이 버는 것도 좋다. 임원 달는 것도 좋다. 창업하는 것도 좋다. 근데 나는 이게 좋다. 코드 짜는 게 좋다. 20년 후에도 짤 거다. 65살까지 짤 거다. 은퇴하는 날까지. 그게 내 길이다.동기들은 다들 임원이고 대표다. 나는 여전히 개발자다. 부럽지만, 내 길이 틀린 건 아니다.

밤 11시, IDE를 켰을 때만 행복한 이유

밤 11시, IDE를 켰을 때만 행복한 이유

밤 11시, IDE를 켰을 때만 행복한 이유 아내가 자고. 아들 자고. 딸도 자고. 집이 조용해진다. 11시 35분. 침대에 누웠다가 일어난다. 다시 옷을 입는다. 거실 소파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IDE를 킨다. 화면이 밝아진다. Visual Studio Code. 검은 배경에 코드들이 떠오른다. 저건 내가 짠 거다. 처음으로 숨을 쉰다. 낮은 회의실의 사람 아침 9시. 출근. "안녕하세요." 사무실 들어서자마자 누군가 손을 흔든다. 신입 녀석이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 눈이다. "어떤데?" 이렇게 물었는데도 내 목소리는 이미 회의실로 향하고 있다. "회의 5분 전입니다."슬랙을 켠다. 빨간 숫자가 붙어있다. 47개. 알림을 읽기 시작한다. 근데 아직도 계속 온다. 읽으면서도 온다. 마치 물 새는 배에서 물 퍼내는 느낌이다. "파트장님, 지난주 리뷰 피드백 주실 수 있을까요?" 후배가 슬랙으로 온다. "당연하지. 언제?" 나는 답했다. 근데 뭐를 리뷰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회의실로 들어간다. 우리 팀 스프린트 플래닝이다. 2주 단위로 뭘 할 건지 정한다. 이게 최소 1시간 걸린다. 다음 회의도 준비되어 있다. 그 다음도. 그 다음도. 점심시간도 별로 끼지 않는다. 팀원 중 한 명이 퍼포먼스가 안 나온다고 한다. "1on1 좀 해주실 수 있어요?" 식당 들어가면서 물어본다. 밥을 먹는다. 누가 밥을 씹는지 모르겠다. 입이 자동으로 움직인다. 오후 2시. IDE를 켜본 지 얼마나 됐나. 어제 짠 코드에 버그가 있다고 했는데 못 봤다. 후배가 픽스했다. 고마움과 뭔가 모를 불편함이 섞인다. 오후 3시. 신입 교육. 이 프로젝트 아키텍처가 왜 이렇게 됐냐는 질문. "글쎄, 예전에 이런 이유로..." 내가 짠 코드를 설명하는데 정작 왜 그렇게 했는지 기억 안 난다. 오후 4시. 고객사 미팅 준비. 우리 시스템이 장애 나진 않았는지 확인. 로그를 본다. 어? 이건 뭐지? 누가 수정했나. 버그처럼 보이는데. 후배한테 물으려다 말았다. 바쁜 것 같았다. 오후 5시. 이사님 앞에서 팀 현황 설명. "진도는?" "예상대로입니다." "기술 부채는?" "관리 중입니다." 이 말들은 내가 한 게 맞나. 누가 한 건지 모르겠다. 퇴근시간. 근데 선배들은 안 간다. 임원들도 안 간다. 우린 뭐 해. 자리에 앉아있다. 6시. 7시. 8시. "파트장님도 이따 집 가세요." 누군가 말한다. 집에 간다. 아내가 밥을 차려놨다. "오늘 힘들었어?" 나는 뭐라고 답할지 모른다. 힘든 게 아니라 그냥... 뭔가 없었다. 아들이 숙제를 묻는다. 수학 문제다. 나는 아들 옆에 앉는다. 근데 집중이 안 된다. 노트북 화면이 자꾸 떠오른다. 아무것도 못 본 코드들. 수정 안 된 버그들. 밤 10시. 침대에 누운다. 모니터 불빛이 없다. 휴식이다. 근데 뭔가 허한데. 밤 11시의 다른 세상 11시 35분. 일어난다. 노트북을 켠다.이번엔 IDE가 내 것 같다. 아무도 안 본다. 회의실도 없다. 슬랙도 울리지 않는다. 알림도 없다. 그냥 내 손과 화면. 요즘 애들이 쓰는 거 있잖아. Next.js? React Query? TypeScript? 복잡한 거들. 나는 요즘 엣지 케이스를 처리하는 거를 해본다. 자내 코드에 있던 거. 예전에 생각했던 거. 그때는 시간 없어서 못 했던 거. 코드를 쓴다. 한 줄. 또 한 줄. 손가락이 기억한다. 스프링 프레임워크. AOP. 트랜잭션 처리. 고급 기술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거다. 어디서 버그가 날지 예상한다. 여기일 거다. 보기 전에 이미 알고 있다. 20년의 패턴 매칭이다. 디버깅을 한다. 콘솔을 본다. 내가 예상한 바로 그 부분이다. 쾌감이 온다. 밤 12시. 컴파일한다. 테스트 통과. 밤 1시. 추가 엣지 케이스를 생각해본다.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밤 1시 45분. 함수를 리팩토링한다. 더 깔끔하게. 변수명을 바꾼다. 더 명확하게. 주석을 달지 않는다. 코드가 스스로 말하게 한다. 이 정도면 됐다. 커밋한다. 메시지를 쓴다. "Refactor: improve exception handling for concurrent requests" git push. 화면을 본다. 초록색으로 떴다. 성공이다.뭔가 채워진다. 이게 나다. 밤이 내 시간이다. 그 다음날 알람. 6시 30분. 3시간 30분 잤다. 침대에서 일어나기가 힘들다. 다리가 무겁다. 가슴이 철렁한다. 아, 내가 또 늦게 잤다. 샤워를 한다. 따뜻한 물이 떨어지는데 눈이 감긴다. 이렇게 자면 안 되는데. 나이가 이 정도면 밤 3시간은 너무 짧다. 출근한다. 피곤하다. 커피를 마신다. 첫 잔은 한 모금에 마신다. 뜨겁지만 상관없다. "파트장님, 안색이 안 좋으신데 괜찮으세요?" 신입이 물어본다. "괜찮아. 어제 늦게 자서." "일 때문에요?" 나는 답하지 않는다. 뭐라고 답해야 하나. 자발적으로 늦게 잠을 안 자고 코드를 짰다고? 아내한테도 이건 말 못 한다. "또 그러셨어요?" 하면서 눈을 굴릴 것 같다. 9시. 회의. 내 눈이 감긴다. 누군가 말하고 있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뭐라고 했지. 내가 대답해야 하는 건가. "파트장님 의견 어때요?" "어? 음. 좋은 것 같은데... 다시 말해줄 수 있을까?" 회의실에서 쑥스러운 웃음이 난다. 점심 후에 더 피곤하다. 몸이 무거워진다. 오후 2시. 눈이 감긴다. 정말 감긴다. 옆 사람을 보니 나도 그렇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후배가 슬랙으로 온다. "파트장님 코드 리뷰 말이에요." 어제 밤에 본 건 저 후배 코드다. 내가 이미 생각해놨는데. 고쳐야 할 부분도 봤고. 근데 지금 그게 뭐였는지 안 난다. "나중에 할게." "알겠습니다!" 오후 3시. 눈 깜빡이는 속도가 느려진다. 오후 4시. 신입이 아키텍처 질문을 한다. 나는 이미 뭘 물을지 예상한다. 해마다 받는 질문이기도 하고, 어제 밤 그 코드 때문에도 알 것 같다. "그거 이렇게 짜는 이유는..." 설명하는데 자꾸 자신의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 혀가 잘 안 돌아간다. 오후 5시. 퇴근시간. 살면서 이렇게 집에 빨리 가고 싶은 적이 없었나. 근데 빨리 가고 싶은 게 맞나. 집에 가면 뭐 하는데. 밥 먹고 아이들 숙제 봐주고 침대에 누워서 다시 일어나는 걸 반복? 집에 간다. 밥을 먹는다. 맛이 안 난다. 피로가 혀를 덮고 있다. 아이들이 조는 게 보인다. 나도 조인다. 밤 10시. 침대에 누운다. 내일도 회의가 있을 거다. 내일도 슬랙이 울릴 거다. 내일도 아무도 안 본 버그가 있을 거다. 근데 내일 밤 11시엔 또 일어날 거다. 다시 노트북을 켤 거다. 그리고 내일은 또 3시간 자고 피곤할 거다.뭔가 빠졌나. 무언가 얻었나. 잘 모르겠다.

회의 중 손가락으로 노트북 만지작대며 생각나는 것

회의 중 손가락으로 노트북 만지작대며 생각나는 것

회의 중 노트북을 만지작대는 손가락들 출근한다. 9시 정각. 메일 함에 메시지 52개. 슬랙, 읽지 않음: 147개. 회의실로 간다. 오늘 회의는 3개. 점심 먹고도 회의. 그 다음에도 회의. 노트북을 켠다. 화면이 켜진다. 손가락이 움직인다. 회의실의 손가락 누군가 말한다. "Q3 로드맵 검토입니다." 들린다. 안 들린다. 뭐라고 하는 건지는 알겠는데. 손가락이 트랙패드를 만진다. 마우스 커서가 이리저리. 더블클릭, 싱글클릭. 브라우저 탭을 연다. 닫는다. 다시 연다. 실제로는 하는 게 없다. 그냥 손가락이 하고 싶어 한다.회의실의 온도는 21도. 책상은 회색. 의자는 검은색. 내 손은 자꾸만 움직인다. 누군가 나를 본다. '파트장님 어떤 의견 있으세요?' 잠깐. 뭐였지? 손가락을 멈춘다. 입을 연다. "네, 좋은 의견들이 있네요." 그리고 또 손가락. 멈출 수 없는 손가락 이게 언제부터였나. 20년 전에는 이런 거 없었다. 그땐 회의실에 들어가도 손은 한 곳에 있었다. 음... 그건 아니고. 30대 때는 회의도 짧았다. 기술 얘기하고. 의견 나누고. 끝. 요즘은 다르다. 회의는 끝나지 않는다. 끝난다고 해도. 다음 회의가 30초 후에 시작된다. 노트북이 날 따라간다. 프로젝터 보면서도. 손은 자동으로. 누군가가 웃는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스크린샷을 찍고 있었나 보다. 아니다. 그냥 트랙패드를 만지고 있었다. '파트장님, 쉬세요.' 후배가 말한다. 쉬고 있다. 이게 쉬는 거다. 손가락이. 손가락이 하고 싶은 이야기 손가락은 뭔가를 해야 한다. 그게 손가락의 규칙이다. 문서 작성. 코드 작성. 무언가. 회의실에서 40분을 손가락 없이 있을 수는 없다. 그건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서 만진다. 목적 없이. 의미 없이. '마이크로서비스 아키텍처로 전환하면...' 누군가의 목소리. 뒷배경음. 손가락은 메모장을 연다. 아무것도 안 쓴다. 커서만 깜빡인다. 내 뇌는 이미 다른 곳에 있다. 어제 본 버그 리포트. 'NullPointerException 발생'. 어디가 문제인지 봤다. 근데 왜 아직도 생각나지? 손가락이 또 움직인다. 검색창에 'Spring Boot actuator'. 치다가 지운다. 지우고 또 친다. 회의 중엔 멀티태스킹이 답이라는 건가.아니다. 멀티태스킹 아니다. 뭐라고 부르지? 반반채스킹. 회의 반. 다른 거 반. 50% 들으면서. 50% 딴 생각. 근데 손가락은 그걸 안다. 진짜 집중하려고 해도. 손가락이 배신한다. 커피 마신다. 손가락이 또 움직인다. 이번엔 슬랙을 본다. 팀 채널. '배포 완료했습니다.' 좋아. 준수네. 손가락이 엄지손가락을 up emoji로 바꾼다. 아니다. 안 누른다. 회의 중이니까. 노트북을 덮는다. 10초. 다시 킨다. 이건 강박이 아니다. 습관이다. 아니다. 둘 다다. 노트북이 없었던 시간들 2000년. 회의실엔 화이트보드만 있었다. 손가락은? 손가락은 펜을 들었다. 종이에 썼다. 메모를 했다. 회의가 끝나면. 종이에 뭔가 남았다. 지금은? 회의가 끝난다. 노트북을 닫는다. 뭐가 남나? 슬랙에 회의록 하나 뜬다. AI가 요약한 거. 내가 쓴 게 아니다. 손가락은 뭘 했나? 트랙패드를 만졌다. 그뿐이다. 옛날에 나는. 펜과 종이를 쥐고 있었다. 무엇이 나에게서 사라졌나. 손가락이 아니라. 다른 게 사라졌나. 노트북을 닫는다. 정말로. 손가락이 울컥한다. 뭘 해야 하지? 40분의 침묵 오후 2시. 회의실. 누군가 말한다. 나는 못 들었다. 노트북은 닫혀 있었다. 손가락이 할 게 없다. 손가락이 책상 위에 있다. 펼쳐져 있다. 모두가 보인다. 그 손가락이 뭘 할 수 있나. 회의를 듣는다. 아, 첫 번째 손가락 역할. 누군가가 질문한다. 나를 본다. 손가락이 떨린다. 노트북이 없으니까. "네, 맞습니다." 이게 나다.손가락은 지금 뭘 하나. 또 안 한다. 그냥 있다.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 이게 더 힘들다. 3년이 5분 만에 끝났다 2021년. 코로나였다. 원격근무. 회의는 줌이었다. 카메라는 어깨 위. 손가락은 안 보였다. 손가락이 자유로웠다. 코드도 짰다. 기술도 공부했다. 손가락도 했다. 그걸 했다. 남들도 했다. 오피스 복귀. 2024년. 3년이 다 사라졌다. 손가락은 또 노트북을 만진다. 이젠 카메라가 앞이다. 모두가 본다. 손가락이. 손가락과 나 손가락은 좋은 도구다. 코드를 친다. 문서를 쓴다. 메일을 보낸다. 손가락은 나쁜 도구다. 회의 중에 불안을 표현한다. 집중력 부족을 드러낸다. 나를 배신한다. "파트장님 주의 산만한데요?" 아직 아무도 이렇게 안 했다. 근데 저 손가락 때문에. 언젠가는 들을까. 8명 팀. 그 중에 신입이 있다. 저 신입이가 나를 보며 배운다. 손가락이. "회의 중엔 이렇게 하는 거군." 아니다. 그러지 마. 손가락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근데 손가락은 멈추지 않는다. 내 손가락이 내 말을 안 듣는다. 멈추고 싶다 회의실 들어가기 전에 다짐한다. "이번엔 노트북 만지지 말자." 회의실 들어간다. 5분. 손가락이 움직인다. 내가 명령을 한다. '멈춰.' 손가락이 말한다. '싫어.' 이건 내 손가락이 아니라. 내 몸이. 내 뇌가. 회의가 지루하단 뜻이다. 집중 못 한단 뜻이다. 아니면. 그냥 나이다. 20년을 코드로 산 팔뚝. 20년을 키보드로 단련된 손가락. 이젠 안 해도 되니까. 더 하고 싶어 한다. 역설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본다 회의가 끝난다. 누군가가 다가온다. "파트장님, 괜찮으세요?" 뭐가. "조금 피곤해 보였어서." 아. 손가락이 말했나. 내 피곤이 손가락으로 새어나갔나. "괜찮아. 그냥 집중하고 있었어." 거짓말이다. 손가락이 알고 있다. 손가락이 쉬는 시간 밤 11시. 집에 간다. 아내는 이미 잠들었다. 아들은 자기 방에. 딸은 자기 방에. 혼자다. 노트북을 켠다. 손가락이 산다. 코드를 친다. 이때가 다르다. 회의실이 아니니까. 손가락이. 자유롭다. 무의식적으로 만지작대지 않는다. 목표가 있으니까. 버그를 찾는다. 로직을 짠다. 뭔가를 만든다. 손가락이 일한다. 정말로. 3시간. 4시간. 시간이 안 간다. 이때 손가락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손가락이 내 생각을 읽는다. 손가락이 나다. 아침이 온다 다시 7시. 알람. 손가락이 스누즈를 누른다. 5분. 또 누른다. 5분. 또. 출근한다. 메일이 있다. 슬랙이 있다. 회의가 있다. 노트북을 켠다. 손가락이 또 움직인다. 이번엔 회의실에서. 또 손가락이 해줄 수 없는 일들. 손가락은 지친다. 나도 지친다. 그래도 움직인다. 후배의 손가락 옆에 앉은 후배를 본다. 30대 초반. 회의 중에 노트북 없다. 손가락이 책상 위에 있다. 펜을 든다. 아날로그 메모장. 손가락이 움직인다. 의미 있게. 뭔가를 쓴다. 뭔가를 남긴다. 나는. 20년 전에 그랬다. 이제 안 한다. 손가락이 달라졌다. 나도 달라졌다. 내일은 어떨까 회의가 또 있다. 내일도. 모레도. 손가락이 또 노트북을 만질까. 근데 이제 알았다. 손가락이 하는 말. "파트장님, 바빠요." "파트장님, 더 하고 싶어요." "파트장님, 지쳐있어요." 손가락은. 나의 또 다른 목소리다. 손가락이 말한다. 나는 듣지 않는다. 그래도. 듣고 있다.밤 11시, 손가락이 다시 산다.

아침 6시 30분, 메일 50개의 공포

아침 6시 30분, 메일 50개의 공포

아침 6시 30분, 메일 50개의 공포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이미 시작된 하루 아침 6시 30분. 여전히 어두운 침실에서 눈을 뜬다.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집어 드는 것이 이제는 본능이다. 아내는 여전히 자고 있고, 시계는 6시 31분을 가리킨다. 첫 번째로 하는 일은 메일함을 여는 것이다. 어제 오후 6시부터 밤 11시까지 쌓인 메일이 이미 24개. 밤 11시부터 새벽 6시까지 쌓인 메일이 26개. 총 50개. 출근도 하기 전에 이미 50개의 메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제는 퇴근 직전에 좋은 결과 나왔다고 했는데... 이게 뭐지?" 메일의 발신자를 슥 훑어본다. 해외 팀(인도, 싱가포르), 국내 다른 부서, 경영진 메일링리스트, 그리고 내가 참여한 12개 프로젝트의 각종 notification 메일들. 메일함을 정리하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결국 그 많은 룰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서 포기했다.이제 슬랙을 본다. 밤새 쌓인 메시지가 대략 93개. 물론 @mention은 아니지만, 내가 참여한 채널들(@박시니어 파트장)에 쓰인 메시지들이다. 인도 팀의 야간 작업 결과 공유: 15개 메시지 싱가포르 팀 아침 회의 결과: 22개 메시지 국내 다른 파트 대기 중인 질문: 8개 메시지 내 팀원들의 저녁 작업 결과 공유: 27개 메시지 CEO 메시지방 공지: 5개 메시지 무작위 팀원 한 명의 '파트장님 이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16개 메시지 스레드집에서는 이렇게 알림이 울린다. 울림음도 켜두지 않은데, 화면은 계속 깜빡인다. 결국 아내가 깬다. "또 일 생각해? 일어나야지." 아내의 목소리는 걱정과 체념이 섞여 있다. 이런 아침이 5일이 반복되니까 당연하다. 화장실에서 시작되는 메일 읽기 마라톤 6시 45분. 화장실에 가면서도 폰을 들었다. 한 손으로 세수하고, 한 손으로 메일을 읽는다. 이미 7년 전부터 이렇게 하고 있다. 처음엔 손에 물이 튀기도 했는데, 지금은 일종의 기술이 되었다. 우선순위를 판단해야 한다. 빨간 느낌표가 붙은 메일부터 본다. 긴급 메일 1호: "시스템 장애 보고" 어제 배포한 기능에서 성능 이슈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표는 6시간 뒤에야 모아진다고. 즉, 이 메일은 5시간 전부터 내 것이 되기로 예정된 것이다. 긴급 메일 2호: "내일 임원진 보고 자료 필요" 내일이 아니라 '오늘 오후 2시까지' 필요하다. 메일 쓴 시간이 어제 8시 27분이다. 즉, 이 사람은 금요일 밤 8시에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지금 화장실에서 이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일반 메일 1호: "프로젝트 진행 상황 공유" 이건 FYI다. 읽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항상 읽는다. 언제 누군가가 "파트장님은 이거 알고 계셨어요?" 라고 물어볼지 모르니까. 일반 메일 2호: "회의 일정 변경 알림" 원래 오전 10시였던 회의가 오전 11시로 변경되었다. 오후 회의는 또 3개가 추가되었다. 즉, 오전 10시부터 12시, 오후 2시부터 5시까지는 이미 다른 일이 할당된 상태로 아침이 시작된다.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머릿속으로 계산한다. 실제 코딩할 수 있는 시간은?오전 9시 출근 오전 10시~12시: 회의 오전 9시~10시: 메일 and 슬랙 검토 점심 12시~1시 오후 1시~2시: 간신히 1시간 오후 2시~5시: 회의 오후 5시~6시: 메일 응답 오후 6시~6시 30분: 1대1 미팅 오후 6시 30분 이후: 코딩?실제로는 이 계획도 1~2번은 깨진다. 누군가는 "파트장님 5분만 시간 돼요?" 라고 슬랙을 친다. 모레 회의를 오늘로 당기자는 메일이 온다. 후배가 코드 리뷰 결과를 물어본다. 결국 오후 1시간? 그것도 낙관적인 추정이다. 출근하면서 마음 먹는 다짐 지하철에 탄다. 여전히 폰으로 메일을 읽는다. "오늘은 달라야지. 오늘은 의도적으로 시간을 만들어야지. 코딩을 할 시간을..." 이 다짐은 일주일에 5번 한다. 대략 일 년에 240번 정도 한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이 다짐이 실현된 적은 몇 번이나 될까?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고 실제로 의미 있는 코드를 짜본 적이 있을까? 있다. 있기는 한데... 그건 대부분 저녁 8시 이후다. 퇴근 후가 아니라, 퇴근하고도 사무실에 남아서 하는 코딩이다. 혹은 일요일 밤 10시. 아이들이 자고 아내도 잔 후에 혼자 노트북을 켜는 그때다. 그때의 코딩이 정말 재미있다. 흐름(flow)이라는 게 있다는 걸 그때서야 느낀다. 25년 전 대학교 2학년 때처럼 코드를 짠다. 시간이 안 간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까지 버티기 힘들다. 새벽 2시 코딩은 다음 날 하루 종일 좀비가 되게 만든다. 그다음 날 회의에서 눈을 감는다. 상사가 내 의견을 물어봐도 답을 못 한다. "파트장님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충 "한번 생각해볼게요" 라고 말한다. 속은 비어있다. 사무실 도착, 그리고 현실 9시 05분. 사무실 도착. 의자에 앉기가 무섭게 슬랙이 온다. "파트장님 아침 회의 자료 확인하셨어요?" 안 했다. 확인한 건 없다. 슬랙을 다시 켜본다. 지난 30분 동안 또 11개의 메시지가 쌓였다. 메일함도 다시 켠다. 또 8개가 왔다. 이제 정말 코딩 IDE를 켜려고 마음먹는다. 오늘은 정말. 노트북을 켜서 IntelliJ IDEA를 실행한다. 로딩된다. 0.5초 안에 슬랙이 또 울린다. "파트장님 통화 가능해요?"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직여서 "네 괜찮아요" 라고 타이핑한다. 이건 마술인가? 내가 언제 이 반응을 학습했을까? 20년 전, 데이터베이스 설계에 한 달을 투자하던 나는 이런 삶을 상상했을까? 당시 나는 "관리자가 되면 높은 곳에서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결정을 한다. 하지만 그건 "누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에 대한 결정이지, "어떤 기술로 무엇을 할 것인가" 에 대한 결정이 아니다. 정책은 다른 사람이 정하고, 일정은 다른 사람이 정하고, 기술 스택도 이제는 다른 사람들(그 중에는 나보다 똑똑한 후배들)이 고민한다. 내가 하는 일은... 뭐지? "파트장님 이거 어떻게 생각해요?"에 "좋네요" 라고 답하는 일? 회의를 소집하는 일? 문제가 터지면 "왜 이렇게 됐어?" 라고 물어보는 일? 메일 50개를 읽는 데 걸리는 현실의 1시간 결국 9시 10분부터 10시 10분까지 1시간을 메일과 슬랙 메시지 정리에 투자한다. 이제 이게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는 알지만,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읽지 않은 메일이 50개 이상 있으면 일종의 불안감이 생긴다. "혹시 중요한 걸 놓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놓친 중요한 메일이 가끔 있다. 따라서 모든 메일을 다 읽어야 한다. 메일을 다 읽고 나면 또 새로운 메일이 와 있다. 특히 해외 팀이 일할 때 추가되는 메일들은 피할 수 없다.결국 이 1시간은 내가 할 수 있는 실제 업무의 20%를 빼앗는다. 근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메일을 다 읽고 나면 이제 답장을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확인하겠습니다. 검토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런 메일들을 30~40개 쓴다. 보통은 "좋은 의견입니다" 정도인데, 때론 정말 생각을 해야 하는 메일도 있다. "이 기술 방향 맞나요?" "이 일정 현실적인가요?" "이 결정 올바른가요?" 이런 메일에는 10분씩 생각해서 답한다. 그럼 또 1시간이 간다.결국 10시가 되는 순간, 아직 회의도 없었는데 벌써 2시간이 간다. 그리고 10시에는 첫 회의가 시작된다. 하루를 돌아보며 드는 생각 오늘도 퇴근했다. 6시 45분. 다시 정리해본다:실제 코딩한 시간: 35분 회의에 쓴 시간: 4시간 20분 메일과 슬랙 읽고 답한 시간: 2시간 30분 후배들 1대1 미팅: 50분 기타 (복도 대화, 누군가의 데스크 방문, 화장실 가는 길에 붙잡힘): 1시간35분. 30대 때는 이게 이해가 안 갔다. 선배 개발자가 "요즘엔 코딩 시간이 별로 없어" 라고 말하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뭐 하는 건데?" 이제 안다. 나는 지금 "코딩 35분짜리 관리자" 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점은, 내 급여는 순전히 코딩 경력으로 책정되었다는 것이다. 코딩을 못 하면 급여를 깎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파트장" 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임원이 되면? 그럼 코딩은 정말로 못 한다. 그때는 순수하게 관리자가 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코딩이 하고 싶다. 아이 아들이 요즘 코딩을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나는 "좋지. 아빠가 가르쳐줄게" 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기술이나 패러다임은 나도 모른다. Rust? Next.js? 서버리스? 이런 건 후배들이 한다. 그래서 아들에게 "흠... 이건 좀 복잡하네. 아빠가 공부하고 나중에" 라고 말한다. 아들의 눈빛이 약간 흐려진다. 그 순간, 정말 슬프다. 정말로 슬프다. 내 가치가 뭐가 되어가는 건지, 정말로 모르겠다. 기술 면접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후보자가 나한테 "현재 프로젝트에서는 어떤 기술을 주로 사용하세요?" 라고 물으면, 나는 "음... 주로 우리 후배들이 하는데, Spring이랑 이런저런 게 있어" 라고 뭉뚱그려서 말한다. 면접관인데 질문에 명확하게 못 답한다. 얼마나 불편한가. 얼마나 초라한가. 그런데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이직? 45세 개발자를 누가 뽑을까? 임원 승진? 그럼 코딩은 진짜 끝난다. 현 상태 유지? 계속 이렇게 조용히 사라져 갈 것인가? 그래도 내일은 또 6시 30분에 눈을 뜬다 내일 아침 6시 30분이면 또 이 모든 게 반복된다. 메일 50개. 슬랙 93개. 그리고 나는 또 "오늘은 좀 다르게 해야지" 라고 다짐할 것이다. 그리고 오전 10시에는 또 회의실에 앉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작은 변화들도 있다. 어제 후배가 쓴 코드를 리뷰했는데, 정말 좋았다. 나보다 더 깔끔하고, 더 창의로웠다. "이 접근 좋네. 이렇게 한 이유가 뭐야?" 라고 물었다. 그 후배가 설명해줄 때, 나는 기술적 흥분을 느꼈다. "아, 내가 이런 마음으로 코딩을 했었지." 그리고 나는 "좋은 선택이야. 계속 이런 식으로 가면 훌륭한 아키텍트가 될 거야" 라고 말해줬다. 그 후배의 얼굴이 환해졌다. 혹시... 내 역할이 이게 아닐까? 코드를 짜는 게 아니라, 좋은 개발자를 만드는 것? 코딩 35분이 아니라, 사람 4시간 20분? 그건 나쁜 일일까? 근데 그렇다면, 왜 이 마음이 자꾸만 IDE로 향할까? 왜 밤 10시의 코딩이 그렇게 행복할까?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일 아침 6시 30분에는 또 폰을 들 것이다. 그리고 또 메일 50개와 마주할 것이다.아침 6시 30분은 여전히, 하루의 시작이자 동시에 절망의 시작이다.